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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leaned_text": "S#1. 복내장터 / 낮\n\n볕이 따갑다.\n왁자지껄한 장터. 국밥집 연기와 옹기 좌판 사이로 장꾼들이 뒤엉켜 오간다.\n장터 입구. 둔탁한 군화 소리. 웅성거리던 소리가 하나둘 잦아든다.\n총을 멘 일본 헌병들이 장터 안으로 들어선다.\n옹기전 앞, 이관회. 헌병 장교의 총구가 천천히 그의 턱밑으로 올라온다.\n조금 떨어진 좌판. 염재보의 무릎 위에 놓인 길쭉한 짚멍석.\n헌병 하나가 손을 뻗는다.\n\n헌병\n(일본어) 그거 내놔.\n\n재보의 손이 멍석 아래로 미끄러진다.\n손끝에 닿는 낡은 화승총의 쇠붙이.\n관회의 턱밑. 총구가 더 깊숙이 밀려든다.\n숨죽인 장터.\n그 순간—\n\n쿵.\n무거운 지게가 흙바닥에 거칠게 내려앉는다. 헌병들의 시선이 장터 한복판으로 쏠린다.\n빈손의 규홍이 성큼성큼 다가온다.\n\n안규홍\n어이.\n\n헌병 장교가 규홍의 거구와 흙 묻은 저고리를 뚫어져라 응시한다.\n규홍이 피식 웃는다.\n\n안규홍\n아, 느그들은... 여수서 돈 자랑말고, 순천서 인물 자랑말고, 보성서\n\n한 걸음.\n\n안규홍\n주먹자랑 허지 마란 말 못 들어봤냐?\n그게 나여.\n\n퍽—!!\n규홍의 주먹이 헌병 장교의 턱에 정통으로 꽂힌다! 장교가 그대로 뒤로 나가떨어진다.\n\n\n파 청\n\nS#2. 안규홍의 집 / 새벽\n\n아궁이 안, 꺼져가는 불씨 하나.\n후—\n누군가 입김을 분다. 불씨가 붉어진다.\n다시 후— 불이 붙는다. 그 앞에 쪼그려 앉은 규홍.\n아직 눈도 덜 떴다.\n약봉지를 뜯어 약탕관에 넣으려 한다.\n\n어머니\n반만 넣어라잉\n\n규홍은 남은 약재까지 전부 털어 넣는다.\n\n안규홍\n아낄것이 따로있제, 뭔 약을 아낀다요.\n\n약탕관 뚜껑을 닫는다. 아궁이에 장작 하나. 툭.\n규홍이 일어난다. 구석에서 지게를 든다.\n\n어머니\n밥은?\n\n규홍이 허리춤에서 찬밥 보퉁이를 툭 들어 보인다.\n\n안규홍\n여그 있소\n\n어머니\n반찬은?\n\n규홍이 보퉁이를 다시 넣는다.\n\n안규홍\n밥이 반찬이제. 댕겨올라요.\n\n규홍이 사립문을 밀고 나간다. 문이 닫힌다.\n잠깐. 다시 벌컥— 문이 열린다. 큰일이라도 난 듯 규홍의 얼굴만 불쑥 들어온다.\n\n안규홍\n오메! 엄니!\n\n어머니\n(놀라 일어나며) 왜, 뭔 일여!\n\n규홍이 씩 웃는다. 능청스러운 표정.\n\n안규홍\n약 아끼지 말고 다 드쇼잉.\n\n어머니\n저놈이 진짜...\n\n문이 다시 닫힌다. 어머니는 닫힌 문을 보다가 피식 웃는다.\n약탕관 주둥이에서 하얀 김이 오른다.\n사립문 밖, 멀어지는 규홍의 지겟다리 짚는 규칙적인 소리.\n탁. 탁. 탁.\n\n\nS#3. 박제현 집 마당·일터 / 아침\n\n뙤약볕이 내리쬔다.\n일꾼 셋이 커다란 볏짐을 지게에 얹으려다 기우뚱, 흙바닥에 처박힌다.\n비명과 흙먼지.\n평상에 앉아 짚신 끈을 조이던 규홍이 일어난다.\n규홍이 쓰러진 볏짐 모서리를 발끝으로 툭 건드려 본다.\n헐떡이는 늙은 일꾼을 본다.\n\n안규홍\n아재는 빠져요. 허리 나가겄소.\n(뒤편 장신 일꾼에게) 네가 뒤 잡아.\n\n장신 일꾼\n내가?\n\n안규홍\n팔 길잖여\n\n규홍이 볏짐 모서리를 잡는다.\n\n안규홍\n둘에 든다. 하나, 둘.\n\n규홍과 장신 일꾼이 동시에 힘을 준다.\n볏짐이 거짓말처럼 쑥 들려 올라간다. 남은 일꾼들이 눈을 크게 뜨고 서로를 본다.\n그때 안채 쪽에서 법화댁이 보자기에 싼 작은 꾸러미를 들고 나온다.\n\n법화댁\n개홍아, 이따 장에 가제?\n\n안규홍\n네 마님. 엄니 약 지으러 갑니다.\n\n법화댁이 보자기를 건넨다.\n\n법화댁\n짚신전 최 서방한테 이것 좀 전해줘라.\n\n안규홍\n예, 마님.\n\n규홍이 보자기를 지게 틈에 끼워 넣고 대문으로 향한다.\n몇 걸음 걷는데— 사랑채 열린 문틈 사이로 낮술상을 사이에 둔 두 양반의 언성이 새어 나온다.\n\n박진성\n세금은 더 걷고, 땅문서는 지들 맘대로 가져가고.. 이래도 가만있어야 쓰것소?\n\n규홍의 걸음이 조금씩 느려진다.\n\n박상현\n괜히 나섰다가 집안부터 거덜납니다.\n\n박진성\n그렇다고 손 놓고 있을 수야 있나.\n\n규홍이 몇 걸음 가다가— 문밖에 우뚝 선다. 지게 작대기 끝으로 흙바닥을 툭 짚는다.\n\n안규홍\n근디 계속 손 놓고 계신 것 같은디요.\n\n문 안, 정적.\n박진성이 술잔을 내려놓으며 천천히 고개를 돌린다. 규홍이 문 쪽을 힐끗 본다.\n\n박상현\n뭐라 했느냐?\n\n안규홍\n아니... 기침만 해서는 쥐새끼도 안 도망갑디다.\n\n박진성\n(벌떡 일어나며) 머슴 놈이 감히\n\n박제현\n개홍아.\n\n규홍이 멈춘다.\n\n박제현\n가봐라.\n\n안규홍\n예.\n\n규홍이 돌아선다. 박진성의 시선이 그 등에 꽂힌 채 떨어지지 않는다.\n대문 옆 툇돌.\n달래가 기다리고 있다. 규홍을 보자마자 얼굴부터 살핀다.\n\n달래\n또 사고 쳤지?\n\n안규홍\n내가 뭘.\n\n달래가 사랑채 쪽을 한번 본다.\n\n달래\n저 안이 저렇게 조용한디 뭘 안 혀.\n\n달래가 삶은 감자 하나를 내민다.\n규홍이 지게를 내려놓지도 않은 채 달래가 내민 감자를 받는다.\n규홍이 감자를 베어 문다. 앗, 뜨겁다. 그래도 태연한 척 씹는다.\n\n달래\n뜨겁제?\n\n안규홍\n안 뜨거.\n\n달래\n눈물 나는디?\n\n규홍이 고개를 홱 돌린다.\n\n안규홍\n연기 들어갔어.\n\n규홍이 달래를 흘겨본다. 달래가 피식 웃는다.\n규홍도 못 참고 웃는다. 지게를 다시 추켜멘다.\n\n\nS#4. 복내장터 / 낮\n\n장날. 생선 좌판, 닭장, 포목전, 짚신전이 빽빽하다.\n국밥집 솥에서는 허연 김이 솟고 장꾼들의 고함이 뒤엉킨다.\n지게를 진 규홍, 관회와 달래가 곁을 걷는다.\n\n상인1\n어이, 개홍이!\n\n규홍이 보지도 않고 손사래를 친다.\n\n안규홍\n(손사래 치며) 아, 안 해라!\n\n상인1\n나 암 말도 안 했는디, 뭐슬 안 혀!\n\n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규홍은 지나가며 무거운 채소 광주리를 번쩍 들어 평상 위에 올려준다.\n상인이 웃는다.\n\n상인1\n거 안 한다매.\n\n규홍도 피식 웃는다. 관회가 규홍 손의 남은 감자에 손을 뻗는다. 규홍이 한입에 털어 넣는다.\n\n이관회\n드럽고 치사해서.\n\n달래가 웃는다. 규홍이 지게 안쪽의 옥색 보자기를 보고 방향을 튼다.\n짚신전. 규홍이 보자기를 최 서방에게 건넨다.\n\n안규홍\n마님 심부름이요.\n\n규홍이 법화댁의 보자기를 건넨다. 최 서방이 받아 옆에 둔다.\n규홍이 돌아서려는데 최 서방의 눈이 규홍의 발에 멎는다. 낡은 짚신 사이로 엄지발가락이 삐져나와 있다. 최 서방이 새 짚신 한 켤레를 툭 내민다.\n\n최 서방\n야, 그거나 하나 갈아 신어라.\n\n규홍의 얼굴이 환해진다.\n\n안규홍\n역시 사람이 정이 있어야제.\n\n규홍이 짚신을 받으려는데 최 서방이 놓지 않는다.\n\n최 서방\n돈은 내고.\n\n규홍의 손이 허공에서 멎는다. 관회와 달래가 웃음을 터뜨린다.\n그 순간— 장터 저편에서 고성이 터진다.\n\n상인2(O.S.)\n지난 장에 냈다니까 그러네!\n\n웃음이 끊긴다. 저잣거리 한복판. 배상도가 장부를 확인하고 있다. 일본인 징세원이 좌판 밑 곡식 자루를 끌어낸다. 상인이 매달리자 조선인 순검이 걷어찬다.\n관회가 슬쩍 규홍을 본다.\n\n이관회\n보지 마라.\n\n안규홍\n뭘.\n\n이관회\n니 얼굴이 벌써 보고 있잖여.\n\n배상도 일행이 짚신전 앞으로 온다. 상도와 규홍의 눈이 마주친다.\n\n배상도\n개홍이냐.\n\n안규홍\n상도냐.\n\n배상도가 장부에서 최 서방 이름을 짚는다.\n\n최 서방\n지난 장에 다 냈네.\n\n배상도\n모자라요.\n\n최 서방\n인자 없어.\n\n일본인 징세원이 주변을 훑다가 조금 전 규홍이 만졌던 새 짚신을 집어 든다.\n최 서방이 붙잡는다.\n\n최 서방\n그건 놔두시오!\n\n징세원이 잡아당긴다. 최 서방도 놓지 않는다.\n퍽!\n군화가 최 서방의 배를 걷어찬다. 최 서방이 멍석 위로 쓰러진다.\n규홍이 반사적으로 한 걸음 나간다. 관회가 즉시 규홍의 팔을 잡는다. 규홍이 멈춘다.\n최 서방이 다시 일어나 짚신을 붙잡는다.\n퍽—! 이번에는 얼굴. 최서방이 쓰러지고 짚신 한 짝이 데굴데굴 굴러간다.\n툭.\n규홍의 낡은 짚신 발끝에 멎는다.\n규홍이 내려다본다. 천천히 고개를 든다.\n\n\nS#5. 복내장터 / 낮 - 계속\n\n탁! 규홍이 지게를 털썩 내려놓는다. 최 서방 앞에 쪼그려 앉아 흙 묻은 짚신을 집어 옷소매로 툭, 툭 턴다.\n\n최 서방\n(피 묻은 입으로) 됐다, 개홍아...\n\n규홍은 말없이 짚신을 최 서방의 망태기에 도로 찔러 넣는다. 그 순간— 일본인 징세원1이 망태기째 낚아채려 든다. 규홍의 두툼한 손이 징세원1의 손목을 콱 붙잡는다. 징세원1이 눈을 부라린다.\n\n징세원1\n離せ！ (하나세! 놔!)\n\n규홍은 손을 놓지 않는다.\n\n안규홍\n임자 있는 짚신이오.\n\n배상도가 다급히 끼어든다.\n\n배상도\n손 놔라, 개홍아. 니 일 아니여!\n\n규홍이 상도를 본다.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n\n안규홍\n남의 거 뺏으면 도둑이제.\n\n장터의 소음이 하나둘 잦아든다.\n징세원1이 규홍의 손을 거칠게 쳐낸다.\n\n징세원1\n邪魔するな！ (자마스루나! 방해하지 마!)\n\n징세원1이 규홍의 가슴을 확 밀친다. 규홍이 몇 걸음 뒤로 밀려 자기 지게에 부딪힌다. 규홍이 옷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턴다. 허리춤의 엽전 꾸러미를 한번 만져본다.\n\n안규홍\n밀지 마쇼. 나 약 사러 가야항께.\n\n규홍이 지게를 다시 짊어지고 몸을 돌린다. 그 순간— 퍽! 징세원1의 주먹이 규홍의 턱을 후려친다. 규홍의 고개가 홱 돌아간다.\n달래가 숨을 삼킨다. 관회의 얼굴도 굳는다.\n\n이관회\n아이고...\n\n규홍이 입안의 피를— 퉤. 천천히 고개를 돌린다.\n징세원1이 다시 주먹을 뻗는 순간— 퍽—!! 규홍의 주먹이 먼저 얼굴에 꽂힌다.\n징세원1이 그대로 뒤로 나가떨어진다. 쿵!\n정적. 장터 사람들이 얼어붙는다. 규홍도 잠깐 자기 주먹을 본다.\n그때 징세원2가 달려든다.\n규홍이 돌아서며 한 방.\n쿵.\n장터 전체가 조용하다. 규홍이 좌우를 본다. 하나, 둘. 둘 다 안 움직인다.\n규홍 얼굴이 순간 하얘진다.\n\n안규홍\n...오메.\n\n황급히 첫 번째 놈에게 달려가 코밑에 손을 댄다. 숨이 있다.\n두 번째 놈에게도 댄다.\n잠시 후— 규홍이 가슴을 쓸어내린다.\n\n안규홍\n오메, 오메... 숨은 쉰다야.\n\n관회가 달려와 규홍의 팔을 잡는다.\n\n이관회\n숨이 문제가 아니여! 너 지금 왜놈 둘을 때려눕혔어!\n\n규홍이 그제야 주변을 본다. 수십 명의 장터 사람들이 입을 벌리고 자신을 보고 있다. 조선인 순검이 칼자루를 잡는다. 규홍과 눈이 마주친다.\n바닥에 뻗은 일본인 둘. 순검의 손이 칼자루에서 떨어진다.\n멀리서— 삐이익—!\n\n상인2\n순사 온다!\n\n관회의 얼굴이 굳는다.\n\n이관회\n개홍아, 인자 진짜 큰일 났다.\n\n관회 손에 엽전을 몽땅 쥐여준다.\n\n안규홍\n엄니 약, 꼭 지어다 드려.\n\n이관회\n야, 너는—\n\n안규홍\n난 나리댁 가 있을랑께.\n\n이관회\n뭐??\n\n안규홍\n일은 해야제.\n\n이관회\n미친놈아, 일이고 뭐고 뛰어!\n\n규홍이 몸을 돌려 달린다. 장터 사람들이 슬쩍슬쩍 몸을 비킨다.\n순식간에 규홍 앞에 길이 생긴다. 규홍이 그 틈으로 사라진다.\n바닥에는 일본인 징세원 둘이 뻗어 있다.\n누군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린다.\n\n상인2\n...한 방씩이었제?\n\n옆의 사내가 멍하니 고개를 끄덕인다.\n장터를 빠져나간다.\n\n\nS#6. 복내장터 / 낮 - 몽타주\n\n조금 전 싸움이 끝난 장터.\n사람들이 쓰러진 일본인들을 멀찍이 둘러싸고 웅성거린다.\n한 사내가 옆 사람에게 낮게 말한다.\n\n사내1\n개홍이가 둘을 한 방씩에 보내부렀다네—\n\n옆 사람이 바로 뒷 사람에게 전한다.\n\n사내2\n박 나리네 머슴 있제. 왜놈 셋을 맨손으로 잡았다드만\n\n그 말을 들은 아이 하나가 눈을 크게 뜬다.\n곧장 장터 골목을 냅다 뛰어간다.\n\n아이\n개홍이가 왜놈 다섯을 때려잡았대!\n\n사람들이 고개를 든다. 저 멀리 달아나는 규홍\n장터 골목, 사람들 사이로 소문이 옮겨 붙는다.\n“개홍이래.”\n“박제현 대감네 머슴.”\n“맨주먹으로 여섯 놈을 때려눕혔다드만.”\n소문은 규홍보다 먼저 달려간다.\n\n\nS#7. 박제현 집 마당 / 늦은 오후\n\n규홍이 박제현 집으로 돌아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지게를 들려는 순간.\n대문 밖 호각 소리. 박제현이 마루에서 내려온다.\n순사·순검들이 들이닥치고 뒤에 배상도.\n\n배상도\n야가 장터서 일본인 둘을 팼습니다.\n\n박제현이 규홍을 본다.\n\n박제현\n니가?\n\n안규홍\n먼저 때리길래요.\n\n순검들이 규홍 팔을 꺾는다.\n규홍이 반사적으로 버티자 둘이 휘청한다.\n규홍, 잠깐 보다가 힘을 뺀다.\n\n안규홍\n살살 하쇼. 옷 찢어징께.\n\n규홍이 끌려나간다.\n마당 한가운데 남겨진 지게.\n\n\nS#8. 안규홍의 집 / 해질녘 or 밤\n\n어둑해진 부엌.\n관회가 아궁이에 얼굴을 들이밀고 바람을 분다.\n후— 후—\n불은 안 붙고 연기만 왈칵 올라온다.\n\n이관회\n콜록! 켁...\n\n방 안에서 어머니의 목소리.\n\n어머니(O.S.)\n개홍이는?\n\n관회의 손이 잠깐 멈춘다.\n\n이관회\n박 나리댁에 일이 쪼까 생겼답니다.\n\n어머니(O.S.)\n뭔 일이 저녁때까지 있당가.\n\n관회가 대답을 못 한다.\n그때 사립문이 열리고 달래가 들어온다.\n관회와 눈이 마주친다.\n달래가 방 쪽을 한번 보고 관회를 밖으로 부른다.\n장독대 옆.\n\n달래\n개홍이 오라버니... 많이 맞겄재?\n\n관회가 애써 웃는다.\n\n이관회\n암시랑토 안 혀.\n갸가 누구한테 맞고 댕길 놈이냐.\n\n달래는 대답하지 않는다. 관회도 웃음을 거둔다.\n둘이 나란히 서서 어두운 사립문 밖을 바라본다.\n\n\nS#9. 보성 주재소 옥사 / 밤\n\n퍽! 퍽! 퍽! 으..윽!\n순사의 몽둥이가 규홍의 뺨을 후려친다. 고개가 돌아간다.\n규홍이 입안의 피를 삼키며 숨을 고른다.\n\n안규홍\n내 말 좀—\n\n퍽—!\n명치를 파고드는 몽둥이. 규홍의 상체가 꺾인다.\n순검 둘이 규홍의 양팔을 뒤로 꺾어 짓누른다.\n규홍이 버티자 두 순검의 몸이 앞으로 쏠린다.\n재보가 손을 멈추고 힐끗 쳐다본다.\n규홍이 주먹을 쥐려다 말고, 스스로 숨을 내쉬며 힘을 푼다.\n\n안규홍\n(바닥을 보며 혼자 중얼...) 모기들이 많네.\n\n순사가 혀를 차며 손짓하자, 순검들이 규홍을 밀치고 나간다.\n철창이 닫힌다. 쾅.\n규홍이 벽에 기대앉아 거친 숨을 고른다.\n구석에 사내 하나가 앉아 헤진 짚신 끈을 고쳐 매고 있다. 염재보.\n재보가 규홍을 한번 훑어본다.\n\n염재보\n개홍이요?\n\n규홍이 재보를 본다.\n\n안규홍\n...나를 아시오?\n\n염재보\n여까지 소문이 먼저 왔소.\n\n규홍이 벽에 등을 기대고 앉는다.\n\n안규홍\n몇 명이랍디까.\n\n염재보\n일곱.\n\n규홍이 고개를 뒤로 젖힌다.\n\n안규홍\n아이고, 염병...\n\n그때—\n복도 저편에서 처절한 비명. 규홍과 재보의 시선이 철창 밖으로 향한다.\n피투성이가 된 사내 하나가 순검들에게 질질 끌려온다.\n\n의병사내\n모른다고... 모른다고 했잖소!\n\n퍽!\n몽둥이가 등을 내리찍는다. 사내가 바닥에 꺾인다. 다시 끌려간다.\n바닥에 긴 핏자국이 남는다. 규홍이 천천히 일어나 창살 앞으로 간다.\n\n안규홍\n저 양반은 뭘 했간디 왜놈들이 저란다요\n\n재보는 짚신 끈을 당겨 묶는다.\n\n염재보\n의병인가 보제.\n\n규홍이 돌아본다.\n\n안규홍\n...의병이요?\n\n복도 끝.\n피투성이 사내가 어둠 속으로 끌려 사라진다.\n규홍은 한동안 바닥에 남은 핏자국을 바라본다.\n철컥!\n옥문이 열린다.\n\n순검\n안개홍. 나와.\n\n규홍이 돌아본다.\n\n순검\n박 나리 덕에 나가는 줄 알아.\n나가서 또 설치지 말고.\n\n규홍이 뜻밖이라는 듯 순검을 본다.\n재보와 잠깐 눈이 마주친다. 규홍이 감방을 나간다.\n쾅!\n재보는 아무 말 없이 다시 짚신 끈을 당겨 묶는다.\n\n\nS#10. 복내장터 / 낮\n\n옥사에서 풀려난 규홍이 장터 골목으로 걸어 들어온다.\n걸음이 느려진다. 어제와 사뭇 다른 풍경.\n뒤집힌 좌판. 찢어진 멍석. 깨진 그릇 몇 개가 흙바닥에 널브러져 있다.\n상인 몇몇이 멍든 얼굴에 피딱지를 붙인 채 묵묵히 깨진 그릇을 줍고 좌판을 세운다.\n규홍과 눈이 마주친다. 상인들은 슬쩍 시선을 피한다.\n짚신전 앞.\n최 서방의 아들이 엉망이 된 멍석을 걷어내고 있다.\n규홍이 다가가 멈춰 선다.\n\n안규홍\n최 서방님은...\n\n아들이 홱 돌아본다. 눈에 원망이 가득 차 있다.\n\n최 서방 아들\n순사들이 끌고 갔소.\n\n규홍이 굳는다.\n\n최 서방 아들\n어제 장터에서... 당신 도망가게 길 터준 놈들 대라면서.\n\n규홍은 아무 말도 못한다. 아들의 눈이 붉어진다.\n\n최 서방 아들\n아부지는 아무것도 안 했소.\n(목이 메어) 그냥 가시오. 제발... 우리 눈앞에 띄지 마시오.\n\n규홍이 천천히 시선을 내린다. 흙바닥\n짚신 한 짝이 짓밟혀 있다. 규홍의 손이 굳게 말린다. 손끝이 파르르 떨린다.\n그러나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n그때, 뒤에서 발소리.\n박제현이 도포 자락을 여미며 다가와 규홍의 곁에 선다.\n박제현은 부서진 장터 좌판들을 둘러볼 뿐, 규홍을 쳐다보지 않는다.\n\n박제현\n왜놈한테 한번 대들고 나면... 너 하나로 끝나는 줄 아느냐.\n\n규홍이 고개를 떨군다.\n\n박제현\n너 못 잡으면 니 곁에 있는 사람부터 잡아간다.\n집안이고 이웃이고... 가리지 않는 놈들이여.\n\n규홍의 눈이 천천히 장터를 훑는다.\n고개를 숙인 사람들. 망가진 좌판.\n최 서방이 사라진 빈자리.\n박제현이 규홍의 어깨를 묵직하게 한번 쥐었다가 놓는다.\n박제현이 먼저 천천히 장터 골목을 빠져나간다.\n규홍은 부서진 짚신 전 앞에 홀로 서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n\n\nS#11. 안규홍의 집 / 새벽\n\n푸르스름한 새벽빛.\n규홍이 작은 봇짐을 꾸린다.\n방 안.\n어머니가 이불을 허리에 두른 채 벽에 기대앉아 있다.\n규홍은 봇짐 끈을 묶으며 한참 말을 못 꺼낸다.\n\n안규홍\n엄니.\n\n어머니가 본다.\n\n안규홍\n내가 여그 있으면...\n엄니도, 동네 사람들도 또 당할 것 같소.\n\n잠시.\n\n안규홍\n쪼까 피해 있을라요.\n\n어머니는 별말 없이 규홍의 봇짐을 본다.\n\n어머니\n쪼까가 얼매나인디.\n\n규홍이 대답하지 못한다. 어머니가 탕약을 한 모금 마신다.\n\n어머니\n밥이나 굶지 마라.\n\n규홍이 피식 웃으려다 만다.\n\n안규홍\n예.\n\n규홍이 자리에서 일어나 큰절을 올린다. 이마가 방바닥에 닿는다.\n\n안규홍\n몸 성히 계쇼잉.\n\n어머니\n니나 성히 댕겨와.\n\n규홍이 고개를 들지 못한 채 잠시 그대로 있다.\n이내 일어나 방문을 닫고 나간다.\n사립문이 삐걱 열리고— 닫힌다.\n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달래 규홍에게 다가간다.\n\n달래\n오라버니. 진짜 가요?\n\n안규홍\n왜.\n\n달래\n진짜 몸 조심허시오. 그리고 이건. 거 오해는 허지말고...\n\n달래가 품에서 작은 옥가락지를 꺼낸다.\n\n달래\n우리 돌아가신 할매가 준건디, 액운을 쫓는 부적 같은 것이랑께 잘 지니고 계시시오.\n\n달래가 억지로 규홍에게 쥐어준다.\n\n안규홍\n(들어보이며..) 이거 뭐여? 옥가락지 아녀?\n\n달래\n(누가 볼까봐 깜짝 놀라 숨기며...) 오메! 부적이란께!\n잘 감추고 계시시오. 복 달아난께.\n\n안규홍\n어? 어... 알것어.\n\n규홍이 품 안에 넣는다.\n\n안규홍\n하여간 너도 몸 조심허고, 위험헌게 뭐슬 막 헐라고 허지 마라이.\n\n달래가 대꾸하기도 전에\n\n안규홍\n언능가.\n\n휙! 돌아서 가는 규홍. 가는 규홍을 못 마땅하게 바라보며 중얼거린다.\n\n달래\n미련 곰탱이 같은.... 그걸 또 믿고 자빠졌네....\n\n몇 걸음 가던 규홍이 돌아본다. 달래가 얼른 입을 다문다.\n규홍은 영문도 모르고 한번 쳐다보다 다시 몸을 돌린다.\n규홍이 마지막으로 달래를 본 뒤 산 안쪽으로 몸을 돌린다.\n\n\nS#12. 논둑길 - 갈림길 / 새벽\n\n안개가 자욱한 새벽 논둑길.\n규홍이 봇짐을 어깨에 메고 묵묵히 걷는다.\n뒤쪽 안개 너머에서 서걱, 서걱, 흙 밟는 발소리가 따라붙는다.\n규홍이 돌아보지도 않고 묻는다.\n\n안규홍\n너는 왜 와.\n\n안개 속에서 관회가 봇짐을 달랑거리며 불쑥 나타난다.\n\n이관회\n니 혼자 가면 또 사고 칠까 봐.\n\n안규홍\n집에 가라잉.\n\n이관회\n싫어.\n\n안규홍\n어디 가는지도 모르잖여.\n\n이관회\n너도 모르잖여.\n\n규홍이 헛웃음을 짓는다.\n두 사람이 나란히 산길을 걷는다.\n산 아래 당산나무 갈림길.\n나무 밑에 앉아 짚신 끈을 고쳐 매던 사내 하나가 인기척에 고개를 든다.\n염재보다.\n규홍이 멈춰 선다.\n\n안규홍\n총은요?\n\n염재보\n왜놈들이 뺏어갔소.\n포수한테 총 뺏고 알아서 먹고살라 하니, 살라는 건지 죽으라는 건지.\n\n관회가 둘을 번갈아 본다.\n\n이관회\n아는 사람이여?\n\n안규홍\n감옥 동기.\n\n염재보\n(피식 웃으며) 동기까지는 좀 그렇고.\n\n재보가 짚신 끈을 조여 매고 일어난다.\n규홍과 관회가 다시 산길을 오른다.\n잠시 뒤—\n재보도 말없이 그 뒤를 따른다.\n\n\nS#13. 대나무 숲 길 / 아침\n\n산길이 끝나고, 빽빽한 대나무숲으로 이어지는 좁은 길.\n바람이 불 때마다 대숲이 서로 몸을 비빈다.\n사각사각—\n규홍, 관회, 재보가 한 줄로 숲길을 내려간다.\n철컥.\n대숲 사이에서 쇠붙이 맞물리는 소리.\n재보가 즉각 멈춰 선다. 고개만 천천히 돌리는 순간,\n대나무 사이로 총구 하나가 모습을 드러낸다.\n반대편에서도 또 하나. 어느새 세 사람을 양쪽에서 겨누고 있다.\n\n남자(O.S.)\n거기서 한 발짝만 더 디디면 가슴팍 뚫린다. 누구냐.\n\n관회가 굳는다. 규홍이 움직이려 하자 재보가 팔을 내밀어 막는다.\n\n염재보\n(바위틈을 향해) 복만아, 총구 치워라.\n\n정적.\n바위 사이 총구가 아주 조금 내려간다.\n\n남자(O.S.)\n...누구요.\n\n염재보\n염재보다.\n\n바위 뒤에서 사내 하나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낸다.\n거칠게 자란 수염.\n낡은 두루마기 어깨에 화승총을 비스듬히 멘 복만.\n복만이 재보 얼굴을 확인한다.\n\n복만\n...염 포수? 뒈진 줄 알았더니 질기게도 살아 있었네.\n\n염재보\n어린놈이 말버릇은 여전하구나.\n미친개 패듯이 맞아봐야 정신 차리겄냐?\n\n복만이 피식 웃는다.\n두 사람이 다가가 서로 어깨를 거칠게 끌어안는다.\n관회가 둘을 번갈아 본다.\n\n이관회\n아는 사람이여?\n\n염재보\n북쪽서 강 대장 따라 여기까지 내려온 놈이여.\n\n복만은 곧 재보 뒤의 규홍과 관회를 본다.\n표정이 다시 굳는다.\n\n복만\n저 뒤 피라미들은 다 뭐이라니?\n\n이관회\n뭐, 피라미? 어이 형씨, 거 말이—\n\n규홍이 관회의 가슴을 손으로 막는다.\n재보가 복만 가까이 다가가 낮게 몇 마디 한다.\n복만의 눈이 규홍에게 간다.\n\n복만\n뭐라니? 왜놈 둘을 맨주먹으로 눕혔다고?\n\n규홍이 피곤한 얼굴로 대꾸한다.\n\n안규홍\n그 얘기는 또 어째 여기까지 왔답니까.\n\n복만이 푸하하 웃는다.\n\n복만\n이 종간나, 일찍 뒈지고 싶어서 환장했구나야.\n\n관회가 규홍을 본다. 복만이 호수 쪽을 턱짓한다.\n\n복만\n일없오.\n여기서 이러고 있을 거면 우리 대장동무한테 가봅시다.\n\n복만이 규홍을 본다.\n\n복만\n대신 하나 명심하라우. 여긴 대장동무 말이 곧 법이오.\n\n규홍이 복만을 잠시 바라본다.\n\n안규홍\n...가봅시다.\n\n복만이 앞장서 대나무길 아래로 내려간다.\n규홍, 관회, 재보가 뒤따른다.\n\n\nS#14. 보성 호숫가, 강용언 임시거점 / 낮\n\n늦은 오후\n산길을 벗어나자 눈앞에 펼쳐지는 거대한 호수주변으로 자갈밭과 대지가 펼쳐져 있다.\n대나무 숲이 바람을 막아주는 앞쪽.\n그 앞으로 낡은 천과 거적을 엮어 만든 임시 막사 몇 채.\n돌 화덕에서 연기가 가늘게 피어오르고,\n사내들이 젖은 짚신을 말리거나 화승총을 닦고 있다.\n등짐과 곡식 자루들은 언제든 뜰 수 있게 묶여 있다. 관회가 호수와 막사를 둘러본다.\n\n이관회\n여그서 산다고?\n\n복만\n사는 건 아니오. 며칠 묵었다 또 옮기는 거요.\n\n바위 아래 큰 무쇠솥. 감자를 으깨 넣은 묽은 죽이 끓고 있다.\n복만이 멍석을 발로 툭툭 털어 자리를 내준다.\n토기 사발이 하나씩 돌아간다.\n관회가 뜨거운 죽을 후후 불며 허겁지겁 들이켠다.\n\n이관회\n이것도 두 그릇 줍니까?\n\n복만\n처음 온 놈이 양심도 없구만 기래.\n\n이관회\n배가 등짝에 붙었구만.\n\n재보가 제 사발의 죽을 관회 그릇에 덜어준다.\n\n염재보\n먹어라. 입이라도 조용해지게.\n\n주변 의병들이 피식 웃는다. 규홍도 죽 한술을 뜬다. 따뜻하다.\n그때, 중앙 뒤쪽 천막에서 걸어 나오는 사내. 칼을 찬 강용언.\n그을린 얼굴에 풍채가 당당하다. 의병들이 길을 터준다.\n강용언이 솥 옆 나이 어린 의병의 빈 그릇에 제 몫의 죽을 툭 덜어준다.\n\n강용언\n먹어라. 아직 클 놈이.\n\n강용언의 시선이 재보에게 닿는다.\n\n강용언\n염 포수라 했소? 총질 좀 하간?\n\n염재보\n입에 풀칠할 만치는 쐈소.\n\n강용언\n그럼 우리보단 낫갔구만. 우린 관동서 여까지 기내려오는 동안 총알보다 밥알 구하는 게 더 힘들었시오.\n\n강용언이 규홍을 본다.\n\n강용언\n그리구... 이쪽이 개홍이? 왜놈 일곱을 맨주먹으로 때려잡았다는 아새끼가?\n\n규홍이 죽을 삼키며 덤덤하게 말한다.\n\n안규홍\n둘이어라.\n\n강용언\n뭐이라니?\n\n안규홍\n두 놈이었당게요.\n\n잠깐의 정적.\n주변에서 웃음이 터지고, 강용언도 호탕하게 웃는다.\n\n강용언\n소문이 저 우에 관동까지 기올라갈 때쯤이면 아주 스무 놈은 되겠구만 기래!\n\n주변에 다시 웃음. 강용언이 규홍 맞은편에 털썩 앉는다.\n\n강용언\n갈 데 없으믄 붙어 있어두 일없소. 밥 한 사발은 노나 먹을 수 있디.\n\n안규홍\n(가볍게 목례하며) 꽁짜로 묵을 생각은 추호도 없응게요. 일거리 있으믄 맘껏 부리쇼.\n\n강용언의 시선이 규홍의 넓은 어깨와 굳은 손에 잠시 머문다.\n\n강용언\n일? 일이야 발에 치이도록 많디.\n\n관회가 규홍 옆에 붙는다.\n\n이관회\n(작게) 됐네.\n\n규홍은 그런 시선도 모르고 사발에 남은 죽을 긁어먹는다.\n바람에 천막이 펄럭이고, 호수가 일렁인다.\n\n\nS#15. 보성 호숫가, 강용언 임시거점 / 밤\n\n해가 넘어간다.\n호숫가 옆 임시거점에 어둠이 내려앉고, 모닥불이 하나둘 밝혀진다.\n타닥, 타닥—\n장작이 빨갛게 타들어간다.\n큰 무쇠솥에서는 조금 전의 묽은 죽 대신 닭 두 마리와 감자를 넣은 국물이 펄펄 끓고 있다.\n규홍과 관회, 재보를 비롯한 의병들이 솥 주위에 둘러앉아 있다.\n관회가 닭다리 하나를 받아들고 눈을 크게 뜬다.\n\n이관회\n오메... 이것이 시방 뭔 일이래.\n\n사내들이 뜨거운 닭고기를 뜯어 허겁지겁 먹는다. 저만치 모닥불가.\n강용언과 복만, 의병 둘이 둘러앉아 있다. 규홍이 닭고기를 뜯다 말고 강용언을 본다.\n\n안규홍\n아니, 대장님.\n대접이 너무 과한 거 아닙니까? 이런 데서 이 귀한 것을...\n\n강용언이 곰방대를 물고 손을 휘휘 젓는다.\n\n강용언\n일없소, 일없어!\n생사를 같이할 동무들이 제 발루 굴러들어왔는데 이만치는 대접해야디.\n\n모닥불 옆의 사람들을 향해 목소리를 높인다.\n\n강용언\n배통 꺼지지 않게 단단히들 처먹어 두라우!\n앞으로 같이 피 흘릴 일이 쌔고 쌨으니 기래!\n\n이관회가 입가에 기름을 묻힌 채 닭다리를 번쩍 든다.\n\n이관회\n예이, 대장님! 뭣이든 시켜만 주쇼잉!\n\n솥 주변에서 웃음이 터진다. 강용언도 호탕하게 웃는다.\n강용언이 복만과 함께 대장 막사 쪽으로 걸어간다.\n모닥불 너머로 멀어지는 강용언의 듬직한 뒷모습.\n규홍이 먹던 것을 멈추고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본다.\n관회가 슬그머니 규홍의 사발에 남은 닭고기 한 점을 집는다.\n규홍이 홱 돌아본다.\n\n안규홍\n야, 그거 내 거여.\n\n관회는 이미 한입 가득 넣었다.\n\n이관회\n니 거가 어딨어. 닭고기에 이름 써놨냐?\n\n안규홍\n니 아까 두 그릇 처먹었잖여.\n\n이관회\n그래서 지금 세 그릇째여.\n\n규홍이 기가 막혀 관회를 본다.\n\n안규홍\n내가 니를 여태 안 죽이고 산 게 용허다.\n\n이관회\n나 없으면 심심해서 어쩔라고.\n\n규홍이 피식 웃는다.\n\n안규홍\n처먹어라, 처먹어. 그 입이라도 막히게.\n\n주변에서 웃음이 터진다.\n관회는 아무렇지도 않게 또 한 숟갈 뜬다.\n\n\nS#16. 민가 마당 / 낮\n\n어느 집, 여기저기서 울부짖는 백성들. 이곳저곳에서 약탈을 하듯 물건들을 빼앗는 사람들.\n다름아닌 의병들의 모습이다.\n닭장에서 닭을 꺼내 자루에 담는 의병. 쓸만한 은비녀를 주머니에 몰래넣는 의병.\n의병 둘이 광 안에서 작고 단단히 묶인 씨나락 자루를 끌어내고 있다.\n늙은 노파가 흙바닥에 주저앉아 그 자루를 붙잡으며 통곡한다.\n\n노파1\n아이고, 그것만은 안 되오! 씨나락이오!\n내년에 뿌릴 종자요!\n\n의병1이 거칠게 노파를 뿌리치고, 노파가 내동댕이 쳐진다.\n\n노파1\n아이고, 이놈들아! 그건 안된다. 차라리 날 죽여라.\n\n의병1\n의병들이 굶고 있는데! 저리 비키시오!\n\n그 앞을 규홍이 성큼 막아선다.\n규홍이 씨나락 자루를 짚신 발로 꽉 밟아 누른다.\n\n안규홍\n다른 건 몰라도... 씨나락은 안 되겄소.\n\n의병1\n뭐? 이놈이 실성을 했나? 대장의 명이시다. 군율이라고, 군율!\n썩 비키거라.\n\n의병1, 규홍을 밀어버리고 쌀자루를 가져가려한다.\n규홍이 놈을 밀쳐 넘어뜨린다.\n다시 씨나락 앞을 막는다.\n\n안규홍\n(의병을 똑바로 쏘아보며)\n그래서 요것을 먹어블믄 저 사람들은 내년에 뭣을 묵고 살란 말이여.\n응? 느그들이 왜놈 새끼들허고 다를게 뭐여\n\n퍽!\n규홍의 머리가 홱 꺾인다.\n무릎이 꺾이며 흙바닥에 쓰러진다.\n흐려지는 시야 너머로 씨나락 자루가 멀어진다.\n\n\nS#17. 보성 호숫가, 강용언 임시거점 / 오후\n\n기울어진 햇빛이 호숫가 자갈밭을 붉게 물들인다.\n자갈밭 너머 잿빛 호수 위로 해가 내려앉고 있다.\n호숫가옆 공터. 의병들과 규홍 일행이 숨을 죽인 채 둘러서 있다.\n그 한가운데, 민가에서 가져온 씨나락 자루 두 개가 놓여 있다.\n머리의 피를 닦아낸 규홍이 강용언 앞에 묵묵히 서 있다.\n곁에 선 복만의 표정도 굳어 있다. 강용언이 씨나락 자루를 턱짓한다.\n\n강용언\n씨나락을 가로막아 나섰다면서 기래?\n\n안규홍\n그건 손대믄 절단 나는 곡식이오.\n\n강용언이 헛웃음을 흘린다.\n\n강용언\n내 씨나락까지 걷으라 시켰으믄 걷는 거이디, 여서 누가 대장질 하간?\n\n안규홍\n(담담하게) 대장은 당신이지요.\n\n강용언\n근데 군율을 어겨 처먹어?!\n\n안규홍\n대장이라 혀도 백성들 씨나락꺼정 털어도 된다는 법은 세상 천지에 없소.\n\n공터가 조용해진다.\n강용언이 규홍의 코앞까지 다가선다.\n\n강용언\n우리 식솔들이 굶어 뒤져 판이 깨지믄, 네 종간나가 책임지갔니?\n\n안규홍\n예. 내가 딴 디 가서 어치케든 구해볼랍니다.\n\n강용언\n못 구해오믄?\n\n안규홍\n그때 가서 굶더라도 손대지 말아야 할 것이 있응게요.\n\n뒤쪽에 선 의병 하나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인다.\n옆의 동료가 강용언의 눈치를 본다.\n강용언이 그 작은 움직임을 놓치지 않는다.\n\n강용언\n주둥아리는 번지르르하구만. 그럼 네놈이 대장 노릇 하디 왜?\n\n안규홍\n싫소.\n\n강용언이 멈칫한다.\n\n강용언\n...뭐이라니?\n\n안규홍\n대장 헐 생각 눈곱만치도 없소.\n근디 먹을 거 없다고 남의 집 씨나락까지 털어가면 안 되제.\n\n규홍이 민가에서 은비녀를 훔쳤던 의병 앞으로 간다.\n손을 내민다.\n\n안규홍\n내놓으쇼.\n\n의병이 머뭇거리다 품에서 은비녀를 꺼내 건넨다.\n규홍이 비녀를 들어 보인다.\n\n안규홍\n뺏지도 말고, 도적질도 하지 말고. 없으믄 가서 사정을 하든가, 땀 흘려 일을 해주든가 헙시다!\n\n잠시.\n\n안규홍\n그래도 정 안 되면 우리가 덜 묵읍시다.\n\n강용언이 규홍을 노려본다. 의병들의 시선이 두 사람 사이를 오간다.\n\n강용언\n기래? 양반 핏줄이라카드만, 고고한 척 하고 싶은기야?\n내 좀 알아봤디, 큰 양반집 서자였는데, 쫒겨났다고....\n\n꾹 참는 규홍\n\n강용언\n밥상 못 차려오면 네놈 모가지부터 비틀어 놓을 테니 기리 알라우!\n\n씨나락 자루를 툭 찬다.\n\n강용언\n내일까지다. 못 처먹이면 그땐 그 주둥이 콱 닥치고 있거라.\n\n강용언이 홱 돌아서 대장 막사로 들어간다.\n공터에 남겨진 씨나락 두 자루. 규홍이 한동안 그것을 바라본다.\n말없이 지게 끈을 고쳐 맨다.\n\n\nS#18. 보성 호숫가 강용언 임시거점 / 늦은 오후녁\n\n붉게 물든 호수 임시거점.\n빈 솥 주변에서 굶주림에 지쳐 널브러져 있던 의병들.\n그 옆에는 아직 손도 안 댄 묶인 씨나락 자루 두 개.\n대장 막사 앞, 강용언이 팔짱을 낀 채 서늘한 눈으로 공터를 내려다보고 있다.\n그때, 대나무 숲 사이로 지게를 진 규홍과 일행이 걸어 들어온다.\n쿵! 쿵!\n보리쌀 자루와 감자 망태가 가마솥 앞 자갈밭에 묵직하게 내려앉는다.\n의병들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몰려든다.\n\n의병1\n(자루를 만져보며) ...보리쌀이네?\n\n의병2\n감자도 있구만~ 이걸 다 어디서 났소?\n\n관회가 땀을 훔치며 으쓱한다.\n\n이관회\n어디서 나긴, 훔쳤쓰까봐? 주막 돌담 쌓고 장작 패주고 받아온 거제.\n아조 힘들어 죽어븐줄 알았네\n\n의병 하나가 규홍의 흙투성이 손을 본다.\n\n의병1\n이걸 다 일해서?\n\n안규홍\n일한 만큼 받아오면 되는 거여.\n뺏지 말고.\n\n의병들의 환호 속에 규홍이 묵묵히 소매를 걷어붙인다.\n\n안규홍\n솥 올리쇼. 밥 먹읍시다.\n\n취사 사내가 번쩍 정신을 차리고 아궁이로 내달린다.\n곡식을 씻고 장작을 넣는 사내들의 손길이 분주하다.\n그 활기와 웃음소리 너머—\n대장 막사 앞, 팔짱을 낀 채 굳어 있는 강용언.\n아무도 강용언에게 묻거나 기대지 않는다.\n타닥- 화르륵!\n아궁이에 활활 타오르는 불길이 강용언의 굳은 얼굴을 붉게 비춘다.\n그의 시선이 불길 너머,\n여전히 풀리지 않은 채 온전히 남아 있는 씨나락 두 자루에 무겁게 꽂힌다.\n\n\nS#19. 보성 호숫가, 강용언 임시거점 / 밤\n\n모닥불 주변.\n배를 채운 의병들이 규홍옆에 모여 웃고 떠들고 있다\n관회도 옆에서 감자를 씹으며 신나게 이야기 하고 있다.\n쨍그랑!—\n대장 막사에서 술병 깨지는 소리. 강용언이 비틀거리며 나온다.\n눈이 벌겋다.\n\n강용언\n종간나 아새끼들 배가 불러 터질라 카는구만.\n\n사내들이 눈치를 본다. 강용언이 규홍 앞으로 다가온다.\n\n강용언\n머슴질이나 하던 종간나가 밥 한 끼 구해왔다고 대장자리까지 넘보는 구만 기래\n\n규홍은 지게를 묶던 손을 멈추지 않는다.\n\n안규홍\n땀 흘려 일허고 묵자고 헌 것뿐이오\n\n강용언\n우린 의병이야!\n나라 찾갔다고 목숨 내놓은 놈들이란 말이다!\n남의 집 담벼락이나 고쳐주고 밥이나 빌어 처먹는 짓거리가 그게 의병이간?\n\n규홍이 고개를 든다.\n\n안규홍\n백성들 거 털어서 배때지 채우는 것은 도적놈이제,\n그것이 어치케 의병이오.\n\n강용언의 얼굴이 굳는다.\n챙—! 환도를 뽑는다.\n\n복만\n대장!\n\n강용언이 칼을 휘두른다.\n규홍이 몸을 피한다. 칼날이 지게를 찍는다.\n쾅!\n강용언이 그대로 규홍에게 달려든다. 둘이 거칠게 엉킨다.\n퍽!\n강용언의 주먹에 규홍의 입술이 터진다.\n\n강용언\n이 종간나새끼, 기렇게 대장이 해처먹고 싶간?!\n\n안규홍\n(이를 악물며) 싫다 안 허요!\n\n규홍의 주먹이 강용언의 턱에 꽂힌다.\n퍽—!\n강용언이 비틀거리다 한쪽 무릎을 꿇는다.\n규홍도 거친 숨을 몰아쉰다. 흙바닥에 떨어진 강용언의 환도.\n규홍이 본다. 집지 않는다. 봇짐을 들어 어깨에 멘다.\n\n안규홍\n가자.\n\n규홍이 돌아선다. 관회와 재보가 바로 따른다.\n의병 둘이 서로를 바라본다. 하나가 짐을 든다. 또 하나가 규홍의 뒤를 따른다.\n강용언이 무릎을 꿇은 채 그 모습을 본다. 복만만 남아 있다.\n강용언과 눈이 마주친다. 복만이 천천히 화승총을 집어 든다.\n강용언의 눈빛이 흔들린다. 복만은 말없이 돌아선다. 규홍 일행을 따라간다.\n\n\nS#20. 박제현 집 사랑채 / 밤\n\n어두운 사랑채.\n박제현, 박진성, 박상현을 비롯한 지역 양반 둘이 둘러앉아 있다.\n평소와 달리 술상도 없다.\n마당 너머 곡간 문에는 붉은 압류 봉인지가 선명하게 붙어 있다.\n\n양반1\n어제는 제 딸아이가 일진회 놈들에게 봉변을 당했소.\n따지러 갔다가... 내가 되레 욕만 먹었소.\n\n양반2\n우리 집은 논도 가져갔소..\n갖다 붙이는 대로 죄가 되니 어찌 살란 말이오.\n\n박진성이 굳은 얼굴로 듣는다.\n\n박진성\n이대로 있다가는 전부 다 빼앗기겠소.\n\n박상현\n그렇다고 들이받을 수는 없잖습니까.\n\n박진성이 성현을 본다.\n\n박성현\n관천하고 척을 져서 좋을 게 뭐가 있습니까\n살릴 것은 살려놓고 봐야지요\n\n박진성\n자넨 언제까지 그 소릴 할 셈인가.\n\n잠시.\n\n양반2\n산에 의병들이 모인다던데.\n\n박상현의 표정이 미세하게 굳는다.\n\n양반1\n강용언 밑에 잇던 자들이던가?\n\n박진성\n강용언이는 이미 흩어졌다던데\n\n양반2가 목소리를 낮춘다.\n\n양반2\n요즘 뭔 머슴놈이 사람을 모은다 하오.\n\n잠시 정적.\n박상현이 헛웃음을 흘린다.\n\n박상현\n개홍이 말입니까?\n\n누구도 웃지 않는다. 박상현의 웃음이 조금씩 사라진다.\n\n박상현\n나라가 어지럽다고... 위아래까지 없어지는 것은 아니잖습니까?\n\n박제현이 천천히 동생을 본다\n\n박제현\n지금 그게 그렇게 중요하냐\n\n박상현\n안 중요합니까?\n머슴이 사람을 거느리고 백성들이 그 말을 듣기 시작하면...\n그 다음은 누가 누굴 거느립니까.\n\n사랑채가 조용해진다. 박제현이 상현을 오래 본다.\n\n박제현\n너는 왜놈보다 그게 더 겁나 보이는구나\n\n상현의 눈빛이 순간 흔들린다.\n박제현은 시선을 열린 방문 너머 어두운 마당 구석을 바라본다.\n규홍이 늘 지게를 세워두던 자리. 지게가 없다.\n박진성의 시선도 그 빈자리로 향한다. 표정이 미묘하게 굳는다.\n\n\nS#21. 산자락 외딴 헛간 or 물레방앗간 / 낮\n\n어두운 헛간.\n규홍, 관회, 재보, 복만과 사내 셋이 지쳐 널브러져 있다.\n규홍은 한쪽 눈이 퉁퉁 붓고 입술까지 터져 얼굴 꼴이 말이 아니다.\n문이 열리고 보자기를 든 달래가 들어온다.\n\n달래\n개홍이 오라버니—\n\n규홍을 보자 그대로 멈춘다.\n\n달래\n아이고야... 얼굴이 왜 이래?\n\n달래가 냉큼 다가와 규홍의 얼굴을 들여다본다.\n\n달래\n누가, 누가 요래부렀어?\n\n안규홍\n아무것도 아녀.\n\n달래가 부은 눈가를 만지려 하자—\n\n안규홍\n아따, 쓰리다!\n\n달래\n쓰린 줄은 아네.\n\n달래가 보자기를 홱 풀어놓는다. 주먹밥이 나오자 사내들이 달려든다.\n\n달래\n천천히 좀 먹어! 누가 뺏어간대?!\n\n이관회\n오메, 살았다.\n\n입안 가득 주먹밥을 문 규홍.\n\n안규홍\n요즘은 뺏어간다며.\n\n달래의 표정이 살짝 바뀐다.\n\n달래\n동네가 난리여. 왜놈보다 배상도 따라댕기는 일진회 놈들이 더 독해.\n어제는 그중 한 놈이 최 서방네 광을 싹 털어갔당께\n\n규홍이 달래를 본다.\n\n달래\n내년에 심을 씨나락까지 즈그집 곳간에 쌓아놨더딘디\n\n규홍의 씹던 입이 멎는다.\n\n안규홍\n...씨나락을?\n\n달래\n한 톨도 안 남기고 싹 쓸어가부렀데.\n\n규홍이 손에 든 주먹밥을 마저 삼킨다. 일어난다.\n\n이관회\n왜.\n\n안규홍\n그건 찾아와야제.\n\n이관회\n어디서?\n\n안규홍\n가져간 놈 곳간에서.\n\n관회가 얼른 자기 주먹밥을 입에 욱여넣고 따라 일어난다.\n재보와 복만도 일어난다.\n달래가 기가 막혀 규홍을 본다.\n\n달래\n오자마자 또 가?\n\n규홍이 입안 가득 씹으며 끄덕인다.\n달래가 한숨을 푹 쉬며 부은 규홍 얼굴을 한번 본다.\n\n달래\n...얼굴 반대쪽은 남겨 갖고 와.\n\n규홍이 피식 웃는다.\n\n\nS#22. 배상도 끄나풀 집 곳간 / 밤\n\n퍽—!\n무쇠 자물쇠가 둔탁하게 부서져 떨어진다.\n복면을 두른 규홍, 관회, 재보, 복만이 곳간 안으로 스며든다.\n관솔불 아래— 쌀가마니와 씨나락 자루, 은비녀와 유기그릇이 수북하다.\n규홍이 자루 먹글씨를 확인한다. \"최 서방 종자\", \"이 씨 볍씨\".\n\n안규홍\n(낮게) 씨나락부터 챙겨.\n\n쾅!\n곳간 문이 열리며 몽둥이를 든 앞잡이가 뛰어든다.\n\n앞잡이\n어떤 놈들이여—!\n\n몽둥이가 관회를 향해 떨어지고, 관회가 그대로 밀려 쌀가마니 더미 쪽으로 넘어진다.\n동시에— 재보의 총구가 앞잡이의 관자놀이에 닿는다.\n\n앞잡이\n(얼어붙어) 사, 살려주쇼! 관에서 시켜서 한 일이오! 나도 먹고살라고 그런 거요!\n\n규홍이 씨나락 자루를 짊어지며 다가선다. 복면 위 눈빛이 서늘하다.\n\n안규홍\n왜놈 앞잡이 노릇 하는 거야 니 목숨줄이니 냅두겄는디, 그 종자자루까지 건들면— 그건 니 목줄이 아니라 동네 사람 명줄을 끊는 거여.\n\n앞잡이가 흙바닥에 이마를 박는다.\n\n\nS#23. 마을 / 밤\n\n어두운 초가집 골목.\n복면을 쓴 규홍 일행이 조용히 움직인다.\n규홍이 한 집 사립문 앞에 멈춘다. 메고 있던 씨나락 자루를 내려놓는다.\n쿵.\n곧바로 다시 걷는다. 조금 뒤.\n재보가 다른 집 툇마루 앞에 쌀자루 하나를 내려놓는다.\n일행은 곧바로 골목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n관회가 배를 문지른다.\n\n이관회\n야, 개홍아. 우리도 굶고 댕기는디... 쪼까만 빼 묵으면 안 되냐?\n\n앞서 걷던 규홍, 뒤도 돌아보지 않는다.\n\n안규홍\n우리 것 아니여.\n\n관회가 입을 삐죽이며 봇짐을 고쳐 멘다. 일행이 마을을 벗어난다.\n\n\nS#24. 복내 장터 국밥집 / 낮\n\n가마솥에서 허연 김이 솟는 북적이는 국밥집.\n장사꾼, 짚신 장수, 나무꾼들이 국밥을 말아먹는다.\n구석 자리.\n거친 옷차림의 사내, 오주일이 묵묵히 국밥을 뜬다.\n낡은 옷깃에는 무언가 뜯어낸 듯한 흔적이 남아 있다.\n옆 평상. 대장장이와 백정, 나무꾼이 탁주잔을 기울인다.\n\n대장장이\n들었는가? 어젯밤에도 앞잡이 놈 곳간 하나 털렸다네.\n\n백정\n누가?\n\n대장장이\n밤마다 복면 쓰고 나타난다더만. 근디 지들이 먹는 게 아니여. 뺏긴 집에 고대로 갖다 놓는댜. 최 서방네 씨나락도 돌아왔고.\n\n나무꾼\n그... 강용언 밑에 있던 개홍이라던디?\n\n백정\n(헛웃음) 박제현네 머슴 개홍이? 머슴이 의병 대장질을 혀?\n\n나무꾼\n대장이든 머슴이든 뺏긴 거 찾아주니 사람들이 좋아하지. 산으로 사람도 붙는다더라.\n\n오주일의 숟가락이 멈춘다. 천천히 고개를 든다.\n\n\nS#25. 보성 주재소 토미이시 집무실 / 밤\n\n정갈한 책상.\n징세 장부, 주판, 붉은 인주.\n토미이시가 장부를 넘긴다.\n맞은편에 배상도가 서 있다.\n\n배상도\n(서툰일본어) 어젯밤에 저희쪽 곳간 하나가 털렸습니다. 걷어놓은 곡식을 다시 마을에 돌려놨답니다.\n\n토미이시는 시선을 들지 않는다.\n\n토미이시\n(일본어) 누구지?\n\n배상도\n(일본어) 복면을 써서 얼굴을 보진 못했는데 아마 산에 있는 놈들 같습니다.\n\n토미이시가 장부의 숫자 하나를 붉은 선으로 긋는다.\n\n토미이시\n(일본어) 그럼 더 걷어\n\n배상도가 잠깐 토미이시를 본다.\n\n배상도\n(조심스럽게, 일본어) 더 걷으면... 사람들이 더 산으로 붙을 수도 있습니다.\n\n그제야 토미이시가 눈을 든다.\n\n토미이시\n(일본어) 붙으라 그래. 사람이 모이면... 안에서 무너뜨릴 놈도 생겨\n\n배상도의 표정이 굳는다.\n토미이시는 다시 장부를 본다.\n\n토미이시\n(일본어) 다음 달 징수량, 스무 섬 올려.\n\n배상도\n(일본어, 놀라며) ...예.\n\n쾅.\n토미이시가 장부에 도장을 찍는다.\n\n\nS#26. 파청 산채 / 낮\n\n산채 공터.\n관회, 재보, 복만을 비롯한 기존 사내들이 한쪽에 서 있다.\n맞은편에는 산 아래에서 새로 올라온 사내들 대여섯.\n봇짐이며 낡은 농기구를 들고 있다. 서로 어색하게 마주 본다.\n새로 온 사내 하나가 먼저 입을 연다.\n\n사내1\n왜놈들 하는 짓거리를 더는 못 보겄소. 씨나락 찾아다 돌려줬다는 얘기도 들었고.\n\n옆의 사내가 고개를 끄덕인다.\n\n사내2\n내 힘이라도 보태고 싶어서 왔소.\n\n잠시 정적.\n규홍이 사람들을 한번 훑어본다.\n\n안규홍\n뭘 할 줄 아시오?\n\n앞에 선 사내가 손을 들어 보인다. 굳은살 박인 손.\n\n대장장이\n나는 대장장이였소. 쇠 만지는 건 자신 있소.\n\n목수\n나는 나무를 좀 다루오.\n\n그다음 백정. 사람들의 시선이 몰린다.\n백정이 코를 한번 훌쩍인다.\n\n백정\n내가... 킁... 뭐라도 할 수 있는 게 있지 않을까 해서 왔는디...\n\n잠시.\n\n백정\n없으믄... 킁... 나 소 잡는 놈이었소.\n\n몇몇이 슬쩍 백정을 바라본다.\n규홍은 아무렇지도 않다.\n\n안규홍\n소도 잡는디 왜놈이라고 못 잡겄소.\n\n순간— 사내들 사이에서 작게 웃음이 터진다.\n백정도 멋쩍게 웃는다. 굳어 있던 어깨가 조금 내려간다.\n그때 뒤쪽에서 한 사내가 앞으로 나온다.\n\n오주일\n대한제국군 군인이었소.\n\n주변이 조용해진다.\n\n관회\n군인?\n\n사내들이 오주일을 새삼 훑어본다. 규홍도 눈빛이 달라진다.\n\n안규홍\n그라믄 잘 왔소. 우린 군인이 한 놈도 없응게.\n\n관회가 규홍을 돌아본다.\n\n이관회\n야, 나는?\n\n안규홍\n너는 나랑 같은 머슴\n\n작게 웃음이 터진다.\n그 웃음이 채 가시기도 전, 맨 뒤에 서 있던 임정현이 슬쩍 손을 든다.\n\n임정현\n나는 글밖에 모르오.\n\n안규홍\n잘됐네. 여그 글 아는 놈 한나도 없소.\n\n\nS#27. 파청 산채 / 낮 - 몽타주\n\n1. 오주일이 나뭇가지를 지휘봉처럼 들고 사내들 앞에 선다.\n\n오주일\n좌향좌.\n\n사내들이 엉거주춤 돈다. 절반은 왼쪽, 절반은 오른쪽.\n\n대장장이\n...좌가 어디여?\n\n백정\n이짝 아니여?..킁..\n\n대장장이\n그건 니 좌제!\n\n관회가 규홍이 부딪칠 뻔한다.\n\n이관회\n사람마다 좌가 다르냐!\n\n오주일, 이마를 짚는다.\n\n2. 숲길. 오주일의 손이 앞으로 나간다.\n한 무리가 뛰쳐나간다. 관회도 냅다 따라간다.\n\n오주일\n관회! 왜 움직였소?\n\n이관회\n쟈들이 가길래.\n\n오주일\n남 간다고 따라가면 자기 자리가 빕니다.\n\n그때 반대편에서—\n쿵!\n재보가 일부러 돌을 굴린다.\n사내들이 화들짝 그쪽으로 움직이려 한다.\n\n오주일\n멈춰!\n\n사내들이 엉거주춤 선다.\n\n오주일\n눈은 가도 발은 가지 마시오. 가야 할 사람이 갑니다.\n\n규홍이 그 말을 듣는다.\n\n3. 나무 그늘.\n\n안규홍\n사람이 진짜 위험해도 안 가요?\n\n오주일\n가야 할 사람이 갑니다.\n\n안규홍\n누가?\n\n오주일\n미리 정한 사람이요.\n\n규홍이 관회와 재보를 번갈아 본다.\n\n안규홍\n그라믄 관회는 움직이는 데 놓고, 재보 형씨는 기다리는 데 놓읍시다.\n\n이관회\n내가 왜.\n\n안규홍\n니가 기다리겄냐?\n\n관회, 입 다문다.\n\n4. 다시 훈련.\n신호. 이번에는 한 무리만 움직인다.\n관회가 반 걸음 나갔다가 멈춘다.\n다른 사내들도 자기 자리를 지킨다. 오주일이 본다.\n\n오주일\n...쓸 만하네.\n\n사내들이 슬쩍 웃는다.\n\n5. 훈련이 끝나고 가마솥 앞으로 몰려드는 사내들.\n솥뚜껑이 열린다.\n멀건 죽. 백정이 자기 사발을 내려다본다.\n\n백정\n이거... 국물이여...킁..죽이여.\n\n웃음이 없다.\n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는 안규홍과 임정현, 이관회.\n임정현의 장부. 손가락이 숫자를 짚는다.\n\n임정현\n남은 쌀로... 사흘.\n\n이관회\n사흘?\n\n규홍이 멀건 죽을 먹는 사내들을 바라본다.\n\n안규홍\n...싸우는 것보다 먹이는 게 더 큰 일이네.\n\n\nS#28. 박제현 집 사랑채 / 밤\n\n사랑채.\n박제현, 박진성, 박상현. 지역 양반 몇이 함께 앉아 있다.\n마당아래. 규홍이 서 있다. 몇 걸음 뒤 관회.\n여러 양반의 시선이 한꺼번에 꽂힌다. 규홍이 허리를 조금 숙인다.\n\n안규홍\n그간 잘 계셨습니까 나리\n\n박제현이 규홍을 본다.\n\n안규홍\n사람이 조까 늘었습니다. 쌀 몇 섬만 빌려주십쇼. 꼭 갚겠습니다.\n\n박진성이 헛웃음을 친다.\n\n박진성\n니가 지금 사람을 거느리고 있다는 것이냐?\n\n안규홍\n거느리는 건 아니고... 같이 있는 겁니다.\n\n박진성\n허. 머슴 놈이 사람 몇 붙었다고 대장 행세를 하더니, 이제 양반들한테 군량까지 내놓으라?\n\n안규홍\n내놓으라는 게 아니라 빌려달라는 겁니다.\n\n박상현이 규홍을 빤히 본다.\n\n박상현\n쌀이 한번 산으로 올라가면 이 집도 의병과 한패가 되는 거다.\n\n규홍은 박제현을 본다. 박제현도 규홍을 보지만 대답하지 못한다.\n\n안규홍\n왜놈들한테 뺏기는 건 괜찮고요?\n\n순간 사랑채가 조용해진다.\n\n안규홍\n전에 다들 그러셨잖습니까. 더는 못 견디겄다고.\n\n양반들의 표정이 굳는다.\n\n안규홍\n근디 막상 싸워보겠다는 놈들이 생기니까...\n(잠시) 내가 머슴이라 영 못 믿겄습니까?\n\n박제현의 얼굴에 미세한 동요. 박상현이 먼저 입을 연다.\n\n박상현\n신분 때문에 이러는 줄 아느냐?\n\n규홍이 본다.\n\n박상현\n니가 사람을 모았다고 해서 세상 이치까지 바뀌는 건 아니다.\n\n안규홍\n세상 이치같은건 잘 모르겄고요..지금 사람들이 굶고 있습니다.\n\n박상현의 입이 멎는다. 규홍은 다시 박제현을 본다.\n박제현의 눈앞에 어릴때부터 이 집 마당을 뛰어다니던 머슴.\n지금은 사람들을 먹이겠다고 자기 앞에 서 있다.\n박제현이 입을 열려다가 곳간 쪽을 본다.\n붉은 압류 봉인지. 가족들. 동생들. 다시 규홍.\n끝내 말하지 못한다. 규홍이 눈치를 챈다.\n\n안규홍\n...됐습니다.\n\n고개를 숙인다.\n\n안규홍\n괜한 부탁 드렸습니다.\n\n규홍이 마당을 가로질러 나간다. 관회가 말없이 규홍의 뒤를 따른다.\n박제현의 시선이 오래 따라간다. 박진성은 여전히 화가 가시지 않았고, 박상현은 굳은 얼굴로 박제현을 본다.\n\n박상현\n오늘은 쌀을 빌려달라 합니다. 내일은 또 뭘 달라 할지 누가 압니까?\n\n박진성이 고개를 끄덕인다.\n\n박상현\n머슴이 사람들 거느리고, 양반이 그 밥을 대기 시작하면...\n\n말끝을 흐린다. 박제현이 차갑게 본다.\n\n박제현\n그리 되면?\n\n박상현\n... 좋을 것 없다는 말입니다.\n\n박제현은 말없이 마당을 본다. 규홍이 서 있던 자리\n\n\nS#29. 파청 산채 / 낮\n\n달래가 숨을 헐떡이며 뛰어 들어온다.\n\n달래\n오라버니!\n\n훈련하던 규홍과 사내들이 돌아본다.\n\n안규홍\n또 뭔 일인데.\n\n달래\n산에서 잡힌 의병 셋이요.\n내일 복내장 지나 광주로 끌고 간답니다.\n\n웃음기가 사라진다.\n\n안규홍\n몇이나 붙었어?\n\n달래\n모르겄소. 총 든 놈들이 여럿이었소.\n\n오주일이 나뭇가지를 내려놓는다.\n\n오주일\n헌병이면 한번 틀어지면 바로 총부터 나옵니다.\n\n안규홍\n나도 알아.\n근디 저 셋 그냥 보내면 죽는 거 아니오.\n\n복만\n그라믄?\n\n안규홍\n셋만 빼냅시다.\n\n오주일과 복만, 의병들이 규홍을 본다.\n\n안규홍\n헌병 잡으러 가는 거 아니오. 나라를 위해 싸우는 백성 구하러 가는 거제.\n\n오주일,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인다.\n\n\nS#30. 복내장터 / 낮\n\n왁자지껄한 장날.\n국밥집 연기가 피어오르고 장꾼과 지게꾼들이 뒤엉킨다.\n그 사이에 보성의진 사내들이 서로 모르는 사람처럼 흩어져 있다.\n규홍은 짐꾼 차림으로 지게를 지고 오간다.\n관회는 옹기전 앞에서 항아리를 만지작거리고, 재보는 짚멍석을 무릎에 올린 채 앉아 있다.\n멍석 안에는 화승총.\n\n오주일은 국밥집 모퉁이에서 장터 입구를 지켜본다.\n관회가 불안한 듯 규홍 쪽을 힐끗 본다.\n오주일이 손가락으로 작게 경고한다.\n관회가 얼른 고개를 돌려 항아리를 살핀다.\n저만치 군화 소리. 장터의 소음이 조금씩 잦아든다.\n일본 헌병 셋이 들어온다. 그 사이로 포승줄에 묶인 의병 포로 셋.\n장꾼들이 슬그머니 길을 비킨다. 관회가 몸을 굳힌다.\n재보의 손이 멍석 아래 화승총을 움켜쥔다. 오주일은 움직이지 않는다.\n헌병 하나가 포로를 거칠게 밀친다. 포로 하나가 넘어지자 군홧발이 날아든다.\n관회가 저도 모르게 한 발 나가려 한다. 오주일의 손이 멈춘다.\n관회가 이를 악물고 제자리로 돌아간다.\n훈련장에서 수도 없이 반복했던 그 동작 그대로다.\n그때— 헌병 하나가 재보를 발견한다. 재보 무릎 위의 길쭉한 멍석을 노려본다.\n헌병이 천천히 다가온다. 재보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n다른 헌병은 관회 쪽을 의심스레 바라본다. 순간 장터 양쪽의 긴장이 팽팽해진다.\n그때—\n\n쿵!\n규홍이 지게를 내려놓는다. 헌병들이 돌아본다.\n규홍이 장터 한복판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온다.\n\n안규홍\n어이, 총 든 양반들..\n\n헌병\n(일본어) 넌 뭐야? 머슴같은 놈이\n\n헌병들이 규홍을 노려본다. 규홍이 피식 웃는다.\n\n안규홍\n느그들 보성서 주먹자랑하지 마란 말도 못 들어봤냐?\n잉! 그게 나여!\n\n퍽—!\n규홍의 주먹이 헌병의 턱에 꽂힌다. 헌병이 옹기 좌판으로 나가떨어진다. 와장창!\n남은 헌병 둘이 소총을 움켜쥔다. 동시에— 오주일의 손이 떨어진다.\n사방에 흩어져 있던 의병들이 일제히 움직인다.\n헌병 하나가 소총을 겨누려는 순간 규홍이 총열을 위로 쳐올린다.\n탕—! 총성이 하늘을 찢는다. 장꾼들이 비명을 지르며 엎드린다.\n헌병이 규홍을 밀쳐내고 총검을 겨눈다. 규홍이 몸을 틀어 피하며 총신을 낚아챈다.\n둘이 거칠게 뒤엉킨다.\n헌병이 총검을 다시 밀어붙이는 순간— 규홍이 총신을 비틀어 빼앗는다.\n그대로 총검을 헌병의 가슴에 밀어 넣는다.\n푹—\n헌병의 몸이 멎는다. 규홍도 순간 굳어버린다.\n재보가 멍석을 다른 헌병의 얼굴에 냅다 밀어붙인다.\n헌병이 휘청이는 순간 관회가 허리를 끌어안고 함께 뒹군다.\n오주일이 마지막 헌병의 손목을 꺾는다. 의병들이 달라붙는다.\n짧고 거친 육박전.\n한 명은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고, 남은 헌병 둘도 흙바닥에 제압된다.\n규홍의 시선이 죽은 헌병에게 잠시 머문다.\n\n이관회\n개홍아!\n\n규홍이 정신을 차린다.\n\n안규홍\n사람부터!\n\n관회가 낫으로 포승줄을 끊는다.\n\n이관회\n하나!\n\n다른 의병이 두 번째 포로의 줄을 자른다.\n\n의병\n둘!\n\n재보가 걷지 못하는 세 번째 포로를 등에 업는다.\n\n염재보\n셋! 됐다!\n\n오주일이 철수 신호를 보낸다.\n\n오주일\n빠져!\n\n사내들이 포로 셋을 부축하고 장터 뒤 골목으로 사라진다.\n쓰러진 헌병들은 그대로 둔다. 누구도 뒤돌아보지 않는다.\n\n\nS#31. 해안 바위지대 / 오후\n\n거친 파도 소리.\n규홍 일행이 바위 뒤로 뛰어들어온다. 구해낸 포로 셋도 함께다.\n사람들이 모래위에 주저않아 거친 숨을 몰아쉰다.\n관회가 바닥에 벌러덩 눕는다.\n\n이관회\n...셋 맞제?\n\n의병 하나가 포로들을 하나씩 확인한다.\n\n의병3\n하나... 둘... 셋...\n셋 다 있소.\n\n여기저기서 숨 섞인 웃음이 터진다.\n규홍이 터진 주먹의 피를 닦는다.\n\n안규홍\n다친 사람부터 봐.\n\n사내들이 일어난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물을 건네고, 천을 찢어 상처를 묶는다.\n한 의병이 포로의 상처를 살피다 규홍을 본다.\n\n의병4\n대장님, 이쪽은 괜찮습니다.\n\n규홍이 돌아본다.\n안규홍\n...뭐?\n\n의병\n대장님이요.\n\n관회가 피식 웃는다.\n\n이관회\n왜. 싫으믄 내가 할까?\n\n안규홍\n그건 더 싫고.\n\n사내들이 웃는다. 규홍도 따라 웃는다. 뒤로 파도가 부서진다.\n\nS#32. 보성 주재소 토미이시 집무실 / 밤\n\n상처투성이로 선 헌병 둘과 흰 천이 덮인 시신 한 구.\n벽 쪽에 굳어 선 배상도, 붓을 든 행정요원.\n테이블에 앉아 서류를 넘기던 토미이시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다.\n토미이시가 시신 앞으로 다가가 천을 걷는다.\n죽은 헌병의 얼굴을 서늘하게 응시한다.\n\n토미이시\n포로는?\n\n헌병\n...셋 모두 빼앗겼습니다.\n\n토미이시\n내가 보성에 온 뒤로 우리 헌병이 죽은 건 처음이군.\n\n토미이시가 벼락같이 돌아서며 헌병의 얼굴을 주먹으로 후려친다!\n퍽—! 헌병이 책상으로 나뒹굴자 멱살을 잡아 벽에 처박고 군화로 사정없이 짓밟는다.\n\n토미이시\n총을 들고 조센징에게 포로를 뺏기고 동료까지 죽게 해?!\n\n거친 숨을 고르며 돌아서는 토미이시. 순식간에 얼음장처럼 가라앉은 눈빛.\n\n토미이시\n누구지. 이 일을 벌인 놈.\n\n배상도가 사색이 되어 앞으로 나선다.\n\n배상도\n박제현 집 머슴인데요... 본명은 안규홍입니다.\n\n토미이시의 눈짓에 행정요원이 먹물을 묻혀 종이에 적는다. 安. 圭. 洪.\n\n토미이시\n사람은?\n\n배상도\n계속 붙고 있습니다. 이번 일로 더 늘어날 겁니다.\n\n토미이시가 행정요원을 본다.\n\n토미이시\n적어. 거괴(巨魁).\n\n붓끝이 다시 움직인다. 巨魁 安圭洪.\n\n토미이시\n떼를 지었으면 떼부터 찢어놔.\n먹이는 놈, 숨겨주는 놈, 돈에 흔들릴 놈까지 전부 찾아.\n\n배상도를 본다.\n\n토미이시\n조선인 잡는 덴 자네 같은 조선인이 제일 쓸 만하니까.\n안규홍 못 잡으면 자네도 끝이야.\n\n배상도의 얼굴이 굳는다.\n토미이시의 시선이 다시—\n\n巨魁 安圭洪.\n\nS#33. 박제현 집 사랑채 / 밤\n\n어두운 사랑채.\n박제현이 혼자 앉아 있다.\n박상현이 들어와 문을 닫는다. 목소리가 낮다.\n\n박상현\n이번엔 제대로 뒤질 모양입니다.\n\n박제현이 본다.\n\n박상현\n개홍이 이름까지 관에 올라갔답니다.\n그 머슴놈 도운 집들도 전부 살펴본다 하고요.\n\n박제현은 대답하지 않는다.\n\n박상현\n설마... 아직도 그놈하고 엮여 있는 건 아니지요?\n\n침묵. 상현의 얼굴이 굳는다.\n\n박상현\n관에서 물으면 모르는 일이라 하십시오.\n관청 쪽은 내가 알아보겠습니다.\n\n박제현이 피식한다.\n\n박제현\n왜놈들하고 통하는 아우가 있으니 참 든든하구나.\n\n박상현\n비꼬지 마시오. 나 하나 좋자고 이러는 줄 아십니까?\n다 집안 지키자고 이러는 것 아닙니까.\n\n박제현\n나라를 빼앗겼는데... 가문은 무슨 소용이냐.\n\n박상현\n그래서요? 기어이 머슴놈 편을 들겠다는 겁니까?\n\n박제현\n머슴이면 편도 들면 안 되느냐.\n\n상현의 얼굴이 굳는다.\n\n박상현\n머슴은 머슴이고, 양반은 양반이지요.\n아무리 세상이 어지럽다고 그게 뒤섞여서야 되겠습니까.\n지킬 것 없는 놈들이니... 저희랑은 다르지요.\n\n박제현\n그렇다고 그걸 지키자고 왜놈 밑에 엎드릴 셈이냐.\n\n박상현이 입을 다문다. 이내 문 쪽으로 몸을 돌린다.\n\n박상현\n말씀 조심하십시오. 듣는 귀가 많습니다.\n\n박상현이 나간다. 문이 닫힌다. 박제현 혼자 남는다.\n시선이 마당 너머 굳게 닫힌 곳간 문으로 향한다.\n\nS#34. 박제현 집 곳간 / 밤\n\n대문이 살짝 열려 있다. 관회가 익숙하게 들어선다.\n마치 몇 번 와본 사람처럼 거침없다. 재보가 뒤따르다 멈춘다.\n\n염재보\n...남의 집 털러 오는데 문이 열려 있소?\n\n이관회\n형님 원래 이런 집이여.\n\n안규홍\n뭔 원래여. 빨리 와.\n\n곳간 앞. 자물쇠도 열려 있다. 재보가 규홍을 본다.\n\n염재보\n대장. 이거 진짜 털어도 되는 거 맞소?\n\n그때 머슴 하나가 곳간 뒤에서 튀어나온다. 목청을 한껏 높인다.\n\n머슴\n도둑이야아아! 의병놈들이 곳간을 턴다아아!\n\n소리는 요란한데 습관적으로 재보가 머슴에게 총구를 겨눈다.\n깜짝 놀란 규홍, 관회 기겁하며 재보를 말린다.\n머슴이 곳간 문을 활짝 열어준다. 규홍 일행 멈칫. 머슴은 급기야 누군가에게 맞기라도 하는 것처럼 스스로 땅을 구르고, 자해를 한다.\n여전히 적응안되는 의병들.\n\n머슴\n아이고 힘도 세다! 못 막겄네!\n\n쌀가마니를 직접 밀어준다.\n재보가 얼떨결에 받는다.\n\n염재보\n...내가 지금 털고 있는 거요, 도움받는 거요?\n\n이관회\n형님 말하지 마쇼. 나도 헷갈링꼐.\n\n다른 머슴들이 뛰어나온다. 그러면서 쌀가마니를 수레에 얹는다.\n손발이 척척 맞는다. 안방 문이 열린다. 법화댁이 나온다.\n\n법화댁\n아이고! 이것들이 우리 집을 다 털어가네!\n\n규홍이 움찔한다. 법화댁이 자루 하나를 규홍에게 안긴다.\n\n법화댁\n이것도 가져가, 도둑놈아!\n\n작게, 규홍의 귀에만 들리게.\n\n법화댁\n그거 말고 옆에 거. 그게 쌀이여.\n\n관회가 웃음을 참는다. 그때 박제현이 사랑채에서 나온다.\n\n박제현\n이놈들! 내 곳간을 다 털어가면 나는 뭘 먹고 살란 말이냐!\n\n규홍이 순간 진지해진다.\n\n안규홍\n...죄송합니다.\n\n박제현이 인상을 쓴다.\n\n박제현\n도둑놈이 왜 사과를 혀! 언능 때려라! (뒷 목을 내어준다)\n\n안규홍\n예, 나리. 용서하십시오.\n\n(얼떨결에 들고 있던 칼 손잡이로 제현의 뒷목을 때린다. 기절하여 쓰러지는 제현을 받는 규홍.)\n\n이관회\n아, 살살때려야제! 오메, 절단 나븐거 아니냐?\n\n안규홍\n아따, 요 각이 안나와가꼬...\n\n이관회\n눕혀놓고 언능와야!\n\n관회가 규홍 등을 떠민다.\n\n이관회\n가자, 이 멍청아.\n\n셋이 수레를 끌고 달아난다. 머슴들이 뒤에서 느릿느릿 쫓는다. 걸음이 일부러 굼뜨다.\n\n머슴들\n잡아라아아! 도둑이야아아!\n\n재보가 뛰며 뒤를 돌아본다.\n\n염재보\n저 사람들... 우리 잡을 생각 없는 거 같은디?\n\n이관회\n그러니까 얼른 갑시다!\n\n수레가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마당이 조용해진다.\n잠시 뒤 쓰러져 있던 박제현의 손가락이 꿈틀한다.\n머슴 하나가 슬쩍 다가가 제현을 일으켜 세운다.\n박제현이 정신을 차리며 뒷목을 움켜쥔다.\n\n박제현\n아이고야... 이놈이 진짜로 때렸네.\n\n머슴들이 웃음을 참는다. 박제현이 인상을 찌푸린 채 사라진 수레 쪽을 바라본다.\n\n박제현\n많이 가져갔냐?\n\n머슴\n시키신 만큼 가져갔습니다.\n\n박제현\n됐다. 문 닫아라.\n\n뒷목을 주무르며 박제현이 안채 쪽으로 걸어간다.\n\nS#35. 마을길 / 밤\n\n규홍과 관회, 재보가 쌀 수레를 끌고 간다. 숨을 몰아쉰다.\n\n염재보\n아따... 걍 들고 나오는 것도 힘드네.\n\n이관회\n그란께요. 맨날 뺏다가 주는거 받아올라니까 이상허네.\n\n길 중앙을 가로 막고 있는 마을사람들. 규홍 일행을 노려보다 각자 흩어진다.\n영문을 몰라 긴장하며 전진하는 규홍일행.\n끼익— 어느 집 사립문이 열린다. 노인이 말없이 보리자루 하나를 수레 위에 올린다.\n\n안규홍\n어르신, 이건—\n\n노인이 손을 내젓고 들어가 버린다.\n조금 더 간다. 아낙이 감자 바구니를 얹는다. 다른 집에서 짚신 몇 켤레, 옥수수.\n문들이 하나씩 열린다. 아무도 거창한 말을 하지 않는다. 수레 위로 살림이 하나씩 쌓인다.\n재보가 뒤를 돌아본다. 아까보다 훨씬 높아진 짐.\n\n염재보\n...이러다 진짜 도둑 되겄소.\n\n관회가 피식한다. 규홍은 웃지 못한다. 수레 위에 쌓인 것들을 바라본다.\n잠깐. 다시 수레를 끈다. 관회와 재보가 붙는다.\n세 사람이 무거워진 수레를 함께 끌고 어둠 속으로 간다.\n\n골목 끝. 박진성과 박상현이 수레를 본다.\n\n박진성\n...형님이 결국.\n\n상현은 닫히는 박제현 집 대문을 본다.\n\nS#36. 파청 산채 / 밤\n\n산길 아래.\n규홍, 관회, 재보가 무거워진 수레를 끌고 올라온다.\n\n이관회(O.S.)\n야아! 사람 좀 나와봐라!\n\n산채의 사내들이 우르르 뛰어나온다.\n수레 위, 쌀가마니에 보리, 감자, 짚신까지 수북하다.\n\n복만\n대장, 이건 안쪽에 들여놓소?\n\n규홍이 수레를 붙잡은 채 바로 대답한다.\n\n안규홍\n어. 쌀은 안쪽. 감자는 그늘에 두고.\n\n복만이 가마니를 둘러메고 간다.\n관회가 규홍을 빤히 본다.\n\n안규홍\n왜.\n\n이관회\n너 이제 대장 소리 바로 알아듣는다?\n\n규홍이 멈칫한다.\n\n안규홍\n사람이 물어보잖여.\n\n관회가 피식 웃는다.\n규홍이 감자 하나를 집에 관회에게 던진다.\n\n안규홍\n시끄럽고 날러.\n\n관회가 감자를 받아낸다.\n\n이관회\n예, 대장님.\n\n안규홍\n아따, 저 새끼가.\n\n사람들의 웃음. 규홍도 쌀가마니 하나를 둘러멘다.\n한쪽. 임정현이 들어온 군량을 빠르게 세어본다.\n\n임정현\n아껴 먹으면... 닷새는 버티겠습니다.\n\n규홍이 고개를 끄덕인다.\n\n안규홍\n닷새면 뭐라도 생기겄지.\n\n옆에서 듣던 오주일.\n\n오주일\n그 ‘뭐라도’가 제일 무서운 겁니다.\n\n안규홍\n아따, 좋은 날 재수 없는 소리 좀 하지 마쇼.\n\n작은 웃음.\n조금 떨어진 곳.\n복만이 쌀가마니를 내려놓다 말고 규홍의 말에 움직이는 사람들을 잠시 바라본다.\n규홍은 그런 시선을 모른 채 다시 수레로 향한다.\n\nS#37. 복내장터 / 낮\n\n복만이 소금과 약재를 사 들고 장터를 지난다.\n한쪽 벽.\n안규홍의 이름이 적힌 방.\n사람 몇이 구경하고 있다. 복만도 멈춘다. 현상금 액수를 본다.\n\n장꾼1\n머슴 하나 목에 돈이 저렇게 붙었어?\n\n장꾼2\n머슴이 아니라 의병 대장이라잖여.\n\n복만의 시선이 안규홍이라는 이름에 머문다.\n그때 뒤에서—\n\n배상도\n같이 다니는 놈들은 이름도 없드만.\n복만이 돌아본다. 처음 보는 배상도.\n배상도가 방을 바라본다.\n\n배상도\n안 그렇소?\n\n복만이 경계한다.\n\n복만\n누구시오.\n\n배상도\n그건 알 거 없고.\n\n복만이 더 상대하지 않고 몸을 돌린다. 산채로 향하려는 순간\n\n배상도\n내일 왜군 군량이 새재로 넘어간다던디.\n\n복만의 걸음이 멎는다.\n배상도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대로 지나친다.\n\n복만\n잠깐.\n\n배상도가 돌아본다.\n\n복만\n그걸 왜 나한테 말해.\n\n배상도\n내가 자네한테 말했나?\n\n입가에 희미한 웃음이 번진다.\n\n배상도\n혼잣말했제.\n\n다시 돌아서는 배상도. 복만이 결국 입을 연다.\n\n복만\n호위는?\n\n배상도의 걸음이 멈춘다. 천천히 고개만 돌려 복만을 본다. 복만이 미끼를 문 걸 확인한 눈이다.\n\n배상도\n많지 않다더군.\n\n배상도가 인파 속으로 사라진다.\n복만이 그 뒷모습을 바라본다. 그리고 다시 벽보를 본다.\n벽보 한가운데 적힌 이름. ‘안규홍.’\n그 아래 찍힌 붉은 관인이 유난히 선명하다.\n\nS#38. 파청 산채 / 해질녘\n\n해가 산등성이 너머로 기운다. 붉은 빛이 목책 사이로 길게 드리운다.\n규홍, 오주일, 임정현, 관회, 재보가 둘러앉아 있다.\n하루 일을 마친 사람들 특유의 나른한 피로가 배어 있다.\n복만이 숨을 헐떡이며 급히 올라온다. 이마에 땀이 맺혀 있다.\n\n복만\n대장.\n\n사람들이 본다.\n\n복만\n내일 왜놈들 군량이 새재로 넘어간다오. 수레 하나. 짐꾼 서너명이랍니다.\n\n안규홍\n호위는?\n\n복만\n많지 않다 합디다.\n\n오주일이 자세를 고쳐 앉는다.\n\n오주일\n누가 그랬습니까?\n\n복만이 잠깐 머뭇거린다. 시선이 살짝 흔들린다.\n\n복만\n장터에서 들었소.\n\n임정현\n누구한테 들었소?\n\n복만\n(조금 짜증스럽게) 그게 뭐이 중요하오. 정보가 딱 들어맞는지가 중요하디.\n\n오주일\n그래서 확인해야 합니다.\n\n잠시. 불편한 침묵이 잠깐 감돈다. 관회가 그 침묵을 깨듯 끼어든다.\n\n이관회\n쌀 한 수레면 한동안 걱정 없겄는디.\n\n임정현이 손끝으로 흙바닥을 짚으며 생각한다.\n\n임정현\n하루만 두고 알아보지요.\n\n규홍이 말없이 사람들을 본다. 시선이 한 명씩 옮겨간다. 잠시 생각한다.\n\n안규홍\n하루 지나면 수레는 넘어가고 없소.\n\n오주일\n함정일 수도 있습니다.\n\n규홍이 고개를 끄덕인다. 부정하지 않는다.\n\n안규홍\n그럴 수도 있제.\n오주일이 규홍을 본다. 그 태연함이 의아하다는 눈빛.\n\n안규홍\n그랑게 욕심내지 맙시다. 쌀만 빼앗고 바로 빠지는 걸로.\n\n잠시.\n\n안규홍\n재보 형씨는 뒤에서 보고, 주일 형씨는 빠질 길부터 봐주쇼.\n\n오주일\n대장은요?\n\n안규홍\n내가 앞에 가야제.\n\n관회\n나는?\n\n안규홍\n넌 나 따라오고.\n\n관회가 씩 웃는다. 긴장을 애써 걷어내려는 웃음이다.\n\n이관회\n예, 대장님.\n\n규홍이 사람들을 둘러본다. 목소리에 무게가 실린다.\n\n안규홍\n사람 하나 안 다치는 게 먼저요. 쌀은 그 다음이고.\n\n오주일이 잠시 규홍을 본다. 못마땅함이 조금 남아 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인다.\n\n오주일\n알겠습니다.\n\n사람들이 하나둘 일어나 각자 준비한다. 총을 점검하는 손, 짚신을 고쳐 매는 손.\n규홍도 낫을 집어 허리춤에 찬다. 손끝으로 날을 한 번 훑는다.\n\n조금 떨어진 곳. 복만만 그대로 서 있다. 움직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혼자 가만히.\n자기가 가져온 정보 하나로 사람들이 움직이고 있다. 그 무게가 얼굴에 조용히 내려앉는다.\n\nS#39. 새재 산길 / 낮\n\n숲속.\n규홍, 관회, 재보, 오주일, 대장장이와 의병들이 나무 사이에 몸을 낮추고 있다.\n멀리 수레 한 대가 모습을 드러낸다. 호위 일본군은 둘. 짐꾼 서너명.\n관회가 규홍을 본다. 정보 그대로다.\n규홍은 바로 움직이지 않는다. 뒤쪽의 오주일을 본다.\n오주일이 산길 주변을 살핀다. 잠시 후,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n수레가 가까워진다. 규홍이 손을 든다.\n조금 더! 손이 떨어진다.\n\n안규홍\n지금!\n\n탕—!\n재보의 총성과 함께 의병들이 뛰쳐나간다.\n관회가 수레꾼을 끌어내리고, 의병들이 일본군 하나에게 달라붙는다.\n짧은 육박전. 순식간에 제압된다. 너무 쉽다.\n\n이관회\n됐다!\n\n규홍이 주변을 살핀다.\n\n안규홍\n쌀만 빼! 오래 붙지 마!\n\n의병들이 수레에 달라붙는 순간!\n삐익~ 산 위에서 새소리 같은 짧은 신호.\n오주일의 얼굴이 굳는다.\n\n오주일\n대장!\n\n탕! 탕!\n양쪽 능선에서 총성이 쏟아진다.\n의병 하나가 그대로 쓰러진다.\n\n안규홍\n엎드려!\n\n숲 사이로 모습을 드러내는 일본군들.\n\n오주일\n함정입니다! 쌀 버려!\n\n의병들이 흩어진다.\n그때 총에 맞은 의병 하나가 쓰러진다. 대장장이가 달려가 부축한다.\n\n대장장이\n일어나! 가자!\n\n부상자를 앞으로 밀어낸다.\n탕—! 대장장이의 몸이 멈춘다. 등에 피가 번진다.\n규홍이 본다.\n\n안규홍\n안 돼!\n\n규홍이 뛰쳐나가려 한다. 오주일이 붙잡는다.\n\n오주일\n죽었습니다!\n\n규홍이 몸을 뿌리친다.\n\n안규홍\n놔!\n\n총탄 하나가 바로 옆 나무를 때린다.\n쾅! 오주일이 규홍을 노려본다.\n\n오주일\n지금 안 빠지면 다 죽습니다!\n\n규홍이 쓰러진 대장장이를 본다. 이를 악문다.\n\n안규홍\n...철수!\n\n의병들이 숲으로 빠진다. 규홍도 돌아선다.\n조금 떨어진 곳 복만이 그것을 본다.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진다.\n\nS#40. 박제현 집 마당 / 낮\n\n쾅! 대문이 열린다.\n배상도와 일본 헌병들이 들어온다. 집안사람들이 놀라 나온다.\n박제현이 사랑채에서 나온다.\n\n박제현\n무슨 일이냐.\n\n배상도\n의병에게 군량을 제공한 혐의로 연행하겠습니다.\n\n박제현이 배상도를 본다.\n\n박제현\n...상도야.\n\n배상도의 표정이 잠깐 흔들린다. 시선을 피하듯 턱을 든다.\n\n배상도\n이제 이름으로 부르지 마시오.\n\n헌병들이 박제현의 팔을 잡는다. 거칠게 비튼다.\n법화댁이 나온다.\n\n법화댁\n나리!\n\n박제현이 손으로 막는다. 괜찮다는 듯. 손끝이 미세하게 떨린다.\n밖에서 소란을 듣고 달려온 박진성과 박상현.\n\n박진성\n형님!\n\n진성이 앞으로 나가려 한다. 박상현이 본능적으로 그의 팔을 붙잡는다.\n진성이 돌아본다. 상현 자신도 순간 당황한다.\n그러나— 손을 놓지 않는다. 손가락에 힘이 들어간다.\n박제현이 끌려나간다. 마지막으로 고개를 돌려 대문 안쪽을 한 번 바라본다.\n박상현의 시선이 그 뒤를 오래 쫓는다.\n\nS#41. 파청 산채 / 밤\n\n침묵. 아침과 완전히 다른 산채.\n군데군데 부상자의 신음. 모닥불 하나가 유난히 낮게 타들어간다.\n대장장이의 자리가 비어 있다. 그가 쓰던 망치만 놓여 있다. 아무도 그 옆에 앉지 않는다.\n임정현이 앉아 무언가 적는다. 붓이 멈춘다.\n\n임정현\n성함을... 뭐라고 적어야 하오?\n\n아무도 대답하지 못한다.\n\n이관회\n그라고 본께 이름도 모르네잉...\n\n염재보\n잘됐제. 의병허다 걸리믄 그 식솔들까지 망허게 해분다는디, 차라리 이름을 암도 모르는 거시 나서...\n\n잠시 후 누군가 조용히 이름을 알려준다. 임정현이 적는다. 붓끝이 가늘게 떨린다.\n규홍이 그것을 보고 있다.\n\n안규홍\n내가 가자고 했소.\n\n오주일이 본다.\n\n안규홍\n확인하자는 것도 내가 안 들었고. 내 잘못이오.\n\n복만이 고개를 든다. 말하려 한다.\n\n복만\n그게—\n\n하지만 말이 나오지 않는다.\n규홍이 일어난다.\n\n안규홍\n죽은 사람 집부터 알아봐주시오.\n\n임정현이 고개를 끄덕인다.\n규홍이 돌아선다. 그 그림자가 빈 망치 옆을 지나간다.\n복만은 바닥을 본다.\n\nS#42. 관청 뒤편 골목 / 밤\n\n어둑한 관청 담장 아래.\n박상현이 서성인다.\n멀리서 배상도가 걸어온다.\n\n배상도\n이 밤중에 어쩐 일이십니까.\n\n박상현이 다가간다.\n\n박상현\n형님을 좀 빼주게.\n\n배상도가 박상현을 본다.\n뜻밖이라는 듯 피식 웃는다.\n\n배상도\n그걸 왜 저한테 말씀하십니까.\n\n박상현\n자네가 일본 사람들하고 통하지 않나.\n\n배상도가 박상현을 위아래로 훑는다.\n\n배상도\n박 나리께서... 저한테 부탁을 다 하시고.\n\n박상현의 얼굴이 굳는다. 모욕을 삼킨다.\n\n박상현\n내가 뭘 하면 되겠나.\n\n배상도의 눈빛이 잠깐 달라진다. 계산이 스치는 눈빛. 하지만 이내 표정을 지운다.\n\n배상도\n됐습니다.\n\n박상현\n됐다니.\n\n배상도\n나리가 뭘 하실 게 있겠습니까. 형님 걱정에 여기까지 오신 거지.\n\n배상도가 지나가려 한다.\n\n박상현\n상도야.\n\n배상도가 멈춘다.\n\n박상현\n형님만은... 무사하게 해주게.\n\n배상도는 돌아보지 않는다.\n\n배상도\n...알아는 보지요.\n\n박상현\n잠깐!\n\n배상도가 돌아본다.\n\n박상현\n개홍이... 잡고 싶지 않은가?\n\n배상도가 홱 돌아본다.\n\n박상현\n거참, 우리 조선 사람들은 잘 알잖여.\n본인 안 잡히면... 옆에 붙은 것부터 건드리는 거.\n\n배상도의 눈빛이 달라진다.\n\n박상현\n그 뭐시냐... 개홍이 옆에 붙어댕기는 사람들 있제.\n특히 그 개집아이.\n\n배상도\n...달래?\n\n박상현이 잠깐 배상도를 본다.\n\n박상현\n이름까진 모르겄고. 잘 살펴보라는 말이여.\n\n배상도의 입가에 천천히 웃음이 번진다.\n\n배상도\n아...\n\n이제야 알겠다는 얼굴.\n관청 안쪽에서 희미한 비명 소리. 상현이 고개를 들지 못한다.\n\nS#43. 관청 앞 / 아침\n\n문이 열린다. 수척해진 박제현이 나온다. 걸음이 휘청인다.\n법화댁이 달려가 부축한다. 박진성도 있다.\n조금 떨어진 곳— 박상현. 형의 몰골을 보고도 다가서지 못한다.\n박제현이 동생을 본다.\n\n박제현\n니가 애썼다더구나.\n\n박상현이 애써 웃는다. 입꼬리만 겨우 올라간다.\n\n박상현\n형님만 무사하면 됐습니다.\n\n박제현이 어깨를 한번 두드린다. 손끝이 떨린다.\n상현은 웃지 못한다. 형의 손이 어깨에서 떨어지는 순간까지 눈을 마주치지 못한다.\n그때, 순사들에게 잡혀서 끌려오는 달래. 머리는 흐트러지고, 양손은 포박당하였다.\n뒷 따라오는 배상도와 눈을 마주치는 상현.\n씩~ 웃어보이며 건물로 들어가는 상도.\n\nS#44. 감옥 취조실 / 밤\n\n어두컴컴하고 차가운 취조실.\n탁자를 사이에 두고 토미이시와 달래가 앉아 있다.\n달래의 얼굴에 핏자국과 흙먼지가 자욱하다. 뒤편 짙은 그림자 속에 배상도가 서 있다.\n\n토미이시\n(일본어) 안규홍은 어디 있지.\n\n달래\n모르오.\n\n토미이시가 담배를 입에 물고 천천히 연기를 뿜어낸다.\n비웃음도, 분노도 없는 서늘한 눈빛.\n\n토미이시\n이상하군. 장터에서 일이 생기면 네가 산으로 간다.\n헌병이 움직여도 산으로 가고. 박제현 집에 일이 생겨도 산으로 가고.\n\n달래의 눈빛이 미세하게 떨린다.\n\n토미이시\n(일본어) 그런데 매번 나물을 캐러 간다?\n\n달래\n나물 캐러 갔소.\n\n토미이시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인다.\n\n토미이시\n(일본어) 그렇겠지. 산에는 나물도 있으니까.\n...그런데 이상하게도, 네가 산에 다녀오고 나면 안규홍은 우리가 움직인 걸 이미 알고 있더군.\n\n달래가 피 묻은 입술을 다물고 토미이시를 노려본다.\n\n토미이시\n(일본어) 안규홍을 오라버니라고 부르더군.\n\n달래가 토미이시를 본다.\n\n토미이시\n(일본어) 피붙이도 아닌데. 참 열심히 뛰었어.\n\n토미이시가 지휘봉 끝으로 뒤편의 배상도를 가볍게 가리킨다.\n\n토미이시\n(일본어) 배상도는 얼굴을 안다.\n넌 누가 누구를 찾아가는지 알고 있고.\n\n잠시.\n\n토미이시\n(일본어) 그래서 네가 여기 있는 거다.\n\n달래의 턱줄기가 팽팽하게 당겨진다.\n토미이시가 상체를 앞으로 지그시 기울인다.\n목소리가 나직해지며 심리적 압박이 극에 달한다.\n\n토미이시\n(일본어) 산채 위치가 싫으면 말하지 않아도 된다.\n안규홍도 필요 없다. ...산에 올라가는 사람 이름 하나. 하나면 된다.\n\n달래가 피 묻은 치맛자락을 꽉 움켜쥐며 토미이시의 눈을 똑바로 응시한다.\n\n달래\n...모른다. 차라리 날 죽여라... 날 죽여. 이 왜놈새끼들아\n\n토미이시가 잠시 달래의 눈을 가만히 바라본다.\n소리를 지르지도, 분노를 터뜨리지도 않는다.\n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는 토미이시.\n\n토미이시\n(일본어) 알았다.\n\n문 앞으로 걸어가는 토미이시.\n문 손잡이를 잡고 멈춰 선다.\n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나직하게 명령을 뱉는다.\n\n토미이시\n(일본어) 계속해.\n\n문이 닫힌다.\n심문과 고문이 계속되고, 달래의 비명이 잔인하게 지속된다.\n\n인서트\n달래의 비명이 지속되는 가운데, 자욱한 새벽안개가 깔린 산길.\n\n숲길 저편에서 관회와 복만이 수레를 끌고 들어온다.\n바위에 올라선 규홍이 목 빼고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n\nS#45. 파청 산채 / 밤\n\n달래의 시신이 짚멍석 위에 뉘어져 있다.\n관회가 옆에 주저앉아 있다. 재보는 고개를 들지 못한다.\n오주일과 의병들이 조금 떨어져 서 있다.\n규홍이 달래 앞에 무릎을 꿇는다. 달래의 피, 흙 묻은 손을 든다.\n손가락 사이사이에 낀 흙을 손끝으로 조심스럽게 털어낸다. 그러다 손이 멈춘다.\n달래의 손가락에 걸린 반쪽 옥가락지. 규홍의 목에도 나머지 반쪽이 걸려 있다.\n규홍이 한동안 그것을 바라본다.\n\n안규홍\n(낮게) ...감자도 못 사줬는디.\n\n아무도 말하지 않는다.\n염재보가 조심스럽게 입을 연다.\n\n염재보\n주재소에서... 고문을 당했다고 하더라.\n끝까지... 아무 말도 안하고...\n\n규홍의 눈이 천천히 재보에게 간다. 재보는 끝내 눈을 들지 못한다.\n규홍이 다시 달래를 본다. 천천히 일어난다.\n낫을 집는다.\n\n안규홍\n가자.\n\n오주일이 앞을 막는다.\n\n오주일\n어딜 말입니까.\n\n안규홍\n주재소\n\n관회도 일어난다.\n\n이관회\n안 돼!\n\n안규홍\n비켜.\n\n이관회\n지금 내려가면 다 죽어.\n\n규홍이 관회를 거칠게 밀친다..\n\n안규홍\n비키라고!\n\n규홍이 나가려 한다. 재보와 오주일이 달려들어 규홍을 붙든다. 규홍이 거칠게 뿌리친다.\n\n안규홍\n놔! 놔!\n\n다시 빠져나가려다 힘이 멎는다. 규홍의 시선이 달래에게 간다.\n그리고 규홍의 손에서 낫이 떨어진다.\n툭.\n\n안규홍\n사람이 자꾸 죽잖아...\n\n목소리가 무너진다.\n\n안규홍\n사람이 자꾸 죽는디...\n나는 뭐를 지킨다고 대장이여,\n\n누구도 대답하지 못한다.\n\n안규홍\n내가 뭔 놈의 대장이냔 말이여...\n\n순간— 모두 멈춘다.\n규홍의 힘이 완전히 빠진다. 달래 곁에 주저앉는다.\n규홍이 달래의 손을 두 손으로 감싸 쥔다. 가락지가 손바닥 안에서 차갑게 닿는다.\n규홍이 한동안 그 손을 바라본다. 이내 목에 걸린 자기 반쪽 가락지를 벗는다.\n달래의 손을 펴, 두 개를 함께 쥐여준다.\n손가락을 하나씩 다시 오므려준다.\n\n안규홍\n갖고 있다가...\n\n말이 한번 막힌다.\n\n안규홍\n다시 만나믄 그때 줘라이.\n액운 쫒는 부적인께...\n\n규홍이 달래의 손을 놓지 못한다. 관회가 바닥에 주저앉아 고개를 숙인다.\n숨죽인 울음. 재보와 오주일은 멀찍이 서 있다.\n누구도 다가가지 않는다.\n\nS#46. 파청 산채 / 아침\n\n아침 햇살이 편백 사이로 비스듬히 들어온다.\n밤새 씻지 못한 규홍.\n\n눈은 퉁퉁 부어 있고, 얼굴엔 흙이 말라붙어 있다.\n흐트러졌던 머리는 다시 단단히 묶었다.\n목에는 아무것도 없다. 규홍이 무심코 빈 목을 한번 만진다.\n\n산채 한가운데. 의병들이 둘러앉아 있다.\n규홍이 사람들을 천천히 본다. 백정. 목수. 재보. 임정현. 오주일. 복만. 관회.\n\n안규홍\n소 잡던 사람도 있고, 나무 만지던 사람도 있고, 산짐승 잡던 사람도 있고...\n\n정현을 본다.\n\n안규홍\n글만 쓰던 사람도 있고.\n나하고 관회는 남의 집 품 팔아 묵고살았고.\n\n관회가 규홍을 본다.\n\n이관회\n나는 왜 꼭 니하고 묶이냐.\n\n작은 웃음. 규홍도 잠깐 웃는다.\n곧 다시 사람들을 본다.\n\n안규홍\n근디 지금은 다 총 들고 여기 앉아 있소.\n\n조용해진다.\n\n안규홍\n나라 지킨다는 거창한 말은... 나도 잘 모르겄소.\n\n규홍이 사람들을 한 명씩 본다.\n\n안규홍\n나는 그냥 우리가 살던 대로 다시 살았으면 좋겄소.\n그때까지는... 서로 살려봅시다.\n\n누구도 대답하지 않는다. 하지만 몇몇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n규홍이 오주일을 본다.\n오주일이 규홍을 본다.\n\n안규홍\n주일 형씨는 사람들 자리 좀 봐주쇼.\n누구 하나 위험하다고 우르르 가지 말고.\n가야 할 사람이 가는 걸로.\n\n오주일\n예.\n\n안규홍\n재보 형씨는 총 쏠 자리 몇 군데 봐두고.\n\n정현 선비는 탄약 여기저기 나눠놓고.\n\n임정현\n그건 걱정마십시오. 대장.\n\n안규홍\n복만 형씨는 뒤쪽 길 좀 봐주쇼.\n\n복만도 고개를 끄덕인다. 규홍이 모두를 본다.\n\n안규홍\n그리고... 내가 안 보여도, 각자 자기 할 일은 하는 걸로 합시다.\n\n이관회\n어디 갈라고?\n\n안규홍\n안 가, 이 새끼야.\n\n웃음.\n사람들이 하나둘 각자의 자리로 흩어진다.\n규홍은 그 모습을 바라본다.\n\nS#47. 파청 산채 / 아침\n\n산 아래서 인기척. 나뭇가지 스치는 소리, 발소리.\n의병들이 돌아본다. 몇몇은 손에 든 총을 슬며시 고쳐 쥔다.\n박상현이 짐꾼 둘과 함께 올라온다.\n쌀자루와 반찬 꾸러미, 술 한 병이 지게 위에 실려 있다. 관회가 반색한다.\n\n이관회\n오메, 이게 다 뭐다요.\n\n박상현\n형님이 보냈다. 사람들하고 나눠 먹어라.\n\n의병들이 짐을 받아든다. 규홍이 다가온다.\n\n안규홍\n나리께서 보내셨습니까?\n\n박상현\n그래.\n\n박상현이 규홍을 잠깐 본다. 시선이 아주 짧게 흔들렸다가 돌아온다.\n\n박상현\n그리고 형님이 하실 말씀이 있단다. 꼭 안 대장을 데려오라시더라.\n\n안규홍\n나리께 또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n\n박상현이 주변을 한번 본다.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는 눈치다.\n\n박상현\n여기서는 말하기 어렵네. 다시 잡혀갈 수도 있어.\n\n규홍의 얼굴이 굳는다. 상현이 관회를 본다.\n\n박상현\n관회, 니도 같이 가자. 가서 손 좀 보태라.\n\n이관회\n나는 왜요?\n\n박상현\n오래 안 걸린다.\n\n관회가 규홍을 본다. 규홍이 고개를 끄덕인다.\n옆에서 듣고 있던 임정현. 쌀자루를 세다 말고 손이 멈춘다.\n\n임정현\n대장.\n\n규홍이 돌아본다.\n정현이 박상현을 한번 보고—\n\n임정현\n나리께서 사람을 보내셔도 될 일인데... 직접 올라오셨네요.\n\n상현의 표정은 변하지 않는다. 규홍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관회의 어깨를 친다.\n\n안규홍\n나리께 급한 일이 있나 보제. 가자.\n\n규홍과 관회가 박상현을 따라 산길을 내려간다.\n임정현은 그 뒷모습을 잠시 바라본다.\n뒤에서\n\n의병(O.S)\n밥이다! 밥!\n\n꾸러미를 열리자 사람들이 몰려든다. 왁자한 소리가 산채를 채운다.\n정현도 시선을 거두고 그쪽으로 간다. 그러나 걸음이 한 박자 느리다.\n\nS#48. 복내 장터 / 낮\n\n규홍과 관회, 박상현이 장터로 들어선다. 익숙한 곳이다. 그런데 이상하다.\n규홍을 알아본 상인이 눈을 피한다. 다른 상인은 규홍을 보자마자 가게 안으로 들어간다.\n관회의 눈이 빠르게 움직인다.\n\n이관회\n...야.\n\n규홍도 걸음을 늦춘다.\n\n안규홍\n나리.\n\n상현은 돌아보지 않는다. 어깨가 미세하게 굳어 있다.\n\n안규홍\n박 나리 어디 계십니까.\n\n대답이 없다. 규\n\n짚신전 앞. 최 서방과 눈이 마주친다.\n최 서방이 아주 작게 고개를 가로젓는다.\n규홍이 멈춘다. 관회도 멈춘다.\n스윽— 앞쪽 골목에서 칼을 찬 일진회원들이 나온다.\n관회가 뒤를 돌아본다. 뒤쪽에서도 나온다. 길이 막혔다.\n\n이관회\n...규홍아.\n\n그 순간— 박상현이 규홍의 등을 거칠게 밀친다. 규홍이 휘청인다.\n상현이 일진회 뒤로 뛰어든다.\n관회가 규홍을 붙잡는다. 규홍이 몸을 세운다. 박상현을 바라본다.\n\n안규홍\n...나리.\n\n상현은 눈을 피한다. 규홍의 표정이 굳는다. 관회가 이를 악문다.\n\n이관회\n이 개새끼가...\n\n규홍이 관회의 앞을 팔로 막는다. 시선은 상현에게 박혀 있다.\n\n안규홍\n설마... 산채까지?\n\n상현은 대답하지 않는다. 그 침묵이 답이다.\n규홍의 얼굴이 무너지듯 굳는다.\n그 순간— 일진회원 하나가 칼을 뽑는다.\n챙!\n뒤이어 일제히 뽑히는 칼.\n챙! 챙!\n관회가 규홍 옆으로 붙는다. 등이 서로 맞닿는다.\n\n이관회\n뒤는 내가 볼게.\n\n규홍이 낫을 움켜쥔다. 손잡이의 흙이 손바닥에 배긴다.\n일진회가 달려든다.\n\nS#49. 파청 산채 인근 편백숲 / 낮\n\n사박. 이슬 젖은 낙엽 위로 군화가 내려앉는다.\n또 한 발. 또 한 발.\n편백 사이로 일본군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두 갈래.\n총을 가슴 높이로 든 채 말 한마디 없다.\n선두의 일본군이 주먹을 든다. 일제히 멈춘다.\n\n나무 사이 저 멀리— 연기 한 줄기가 올라온다. 파청 산채.\n선두가 뒤를 향해 손짓한다. 왼쪽. 오른쪽.\n일본군들이 소리 없이 갈라진다. 낙엽 하나 밟는 소리조차 조심스럽다.\n\nS#50. 파청 산채 / 낮\n\n딸그락. 밥그릇 부딪는 소리.\n의병들이 삼삼오오 둘러앉아 밥을 먹는다. 오랜만의 쌀밥.\n\n의병4\n야, 그것 좀 남겨라.\n\n의병5\n먼저 먹는 놈이 임자제.\n\n웃음이 터진다. 재보가 밥을 크게 한 숟갈 뜬다.\n\n염재보\n아따.. 밥이 밥 같네.\n\n정현도 피식 웃는다. 오주일은 먹으면서도 습관처럼 숲 쪽을 한번 본다.\n조금 떨어진 곳. 보초 의병 하나가 숲을 지켜보고 있다.\n\nS#51. 복내 장터 / 낮 - 같은 시각\n\n챙!\n칼이 규홍의 얼굴 앞으로 떨어진다. 규홍이 낫자루로 막는다.\n옆에서 다른 놈이 달려든다. 관회가 몸으로 들이받는다.\n와장창!\n둘이 좌판 위로 넘어간다.\n규홍이 한 놈의 손목을 꺾는다.\n챙그랑! 칼이 떨어진다. 하지만 앞에서 둘이 더 달려든다.\n\n이관회\n야, 겁나 많다.\n\n안규홍\n세지 마!\n\n칼이 다시 쏟아진다.\n규홍이 하나를 막는 순간 뒤에서 들어온 칼날이 등을 긋는다.\n\n안규홍\n크윽—\n\n관회가 돌아본다.\n\n이관회\n규홍아!\n\n안규홍\n앞에 봐!\n\n규홍이 몸을 돌려 낫자루로 놈의 얼굴을 후려친다.\n퍽!\n둘은 다시 등을 맞댄다.\n\nS#52. 파청 산채 / 낮 - 같은 시각\n\n산채가 내려다보이는 능선.\n토미이시와 배상도가 내려다보고 있다.\n\n토미이시\n(일본어) 안규홍은?\n\n배상도\n(일본어) 지금쯤 장터에서 끝났을 겁니다.\n\n토미이시가 산채를 내려다본다.\n\n토미이시\n(일본어) 그럼 여긴 더 쉽겠군.\n\n토미이시가 다시 산채를 본다.\n손가락 두 개를 편다. 일본군들이 좌우로 갈라진다. 산채를 감싼다.\n배상도가 침을 삼킨다. 토미이시가 천천히 오른팔을 든다.\n\nS#53. 복내 장터 / 낮 - 같은 시각\n\n관회가 칼을 피한다.\n늦었다.\n서걱!\n옆구리가 베인다. 관회가 이를 악문다.\n\n이관회\n아씨...\n\n규홍이 본다.\n\n안규홍\n관회야!\n\n규홍이 가려는 순간 일진회 대장이 길을 막는다.\n관회가 한 손으로 옆구리를 누른 채 앞의 놈을 걷어찬다.\n퍽!\n\n이관회\n앞이나 봐, 이 새끼야!\n\n규홍이 이를 악물고 다시 돌아선다.\n\nS#54. 파청 산채 / 낮 - 같은 시각\n\n산채 바깥. 보초를 서던 의병 하나.\n고요한 숲을 바라본다.\n그때 나무 뒤에서 검은 총구 하나가 아주 천천히 나온다.\n보초가 눈을 가늘게 뜨고 쳐다본다.\n정현이 밥을 먹다 말고 고개를 든다.\n\n오주일\n왜 그러시오.\n\n정현이 숲 쪽을 본다.\n\n임정현\n...아닙니다.\n\n다시 편백 사이. 총구 하나. 반대편에도 하나.\n산채를 둘러싼다.\n\nS#55. 복내 장터 / 낮 - 같은 시각\n\n관회의 숨이 거칠다.\n한 손으로 옆구리를 누른 채 몽둥이를 휘두른다.\n퍽!\n놈 하나가 쓰러진다. 관회의 다리가 순간 휘청.\n규홍은 앞의 놈과 엉켜 있다. 주먹으로 얼굴을 때린다. 낫자루로 턱을 올려친다.\n그리고 관회를 본다.\n관회 뒤편. 칼을 든 일진회원 하나가 다가오고 있다. 규홍의 눈이 커진다.\n\n안규홍\n관회야!!\n\n관회가 돌아본다. 늦었다.\n푹—!\n칼이 관회의 배를 파고든다. 관회의 몸이 굳는다.\n규홍의 눈. 관회와 눈이 마주친다.\n순간— 모든 소리가 먹먹해진다.\n칼이 빠진다.\n관회의 무릎이 꺾인다.\n\n안규홍\n관회야!!\n\n규홍이 미친 듯이 달려가려 한다. 하지만 앞을 일진회 대장이 막는다.\n규홍이 놈을 그대로 들이받는다.\n퍽!\n\n관회는 배를 움켜쥔 채 주저앉는다. 자기를 찌른 놈이 돌아서려는 순간.\n관회가 놈의 발목을 붙잡는다.\n마지막 힘으로 몽둥이를 휘두른다.\n퍽!\n놈이 쓰러진다. 관회도 옆으로 무너진다.\n규홍이 마지막 일진회 대장을 베고 관회에게 달려간다.\n관회의 다리가 풀린다. 규홍이 달려와 관회를 붙잡는다.\n둘이 그대로 흙바닥에 주저앉는다.\n\n안규홍\n야. 야, 봐봐.\n\n규홍이 관회의 배를 누른다. 피가 손가락 사이로 번진다.\n관회의 눈이 겨우 규홍을 향한다.\n\n안규홍\n일어나. 산채 가야제.\n\n관회가 숨을 들이마시려 한다. 잘 되지 않는다. 그래도 희미하게 웃는다.\n\n이관회\n...그러니까 가.\n\n안규홍\n뭔 소리여. 같이 가야제.\n\n관회가 규홍의 옷깃을 잡는다. 힘이 없다.\n\n이관회\n산채 가라고... 이 새끼야.\n\n규홍이 굳는다.\n관회의 손이 천천히 규홍의 옷깃에서 미끄러진다.\n\n안규홍\n관회야.\n\n관회가 규홍을 보고 있다. 눈은 떠 있는데 더는 초점이 없다.\n\n안규홍\n야... 이관회!\n\n대답이 없다. 규홍이 그대로 멈춘다.\n그 순간— 와장창! 멀리서 좌판 무너지는 소리.\n규홍이 천천히 고개를 든다.\n박상현이 달아나고 있다. 규홍이 그를 본다.\n방금까지 떨리던 규홍의 숨이 멎는다.\n천천히 관회를 내려놓는다.\n피 묻은 낫을 집는다.\n일어난다.\n\nS#56. 파청 산채 인근 능선 – 파청 산채 / 낮 - 같은 시각\n\n토미이시 오른팔을 든 채 산채를 바라본다.\n\nCUT TO.\n\n재보가 마지막 밥 한 숟갈을 입에 넣는다.\n밥그릇을 내려놓는다.\n딸그락.\n\nCUT TO.\n\n보초 의병. 숲을 바라보다 멈춘다.\n편백나무 뒤. 총구.\n보초의 표정이 굳고 눈이 커진다.\n\n보초 의병\n왜!\n\nCUT TO.\n\n토미이시의 팔이 떨어진다.\n탕!\n보초가 뒤로 꺾인다.\n곧이어 콰콰광! 쾅! 쾅!\n사방에서 일제사격. 밥그릇이 깨진다. 의병 하나가 밥을 씹던 그대로 쓰러진다.\n솥이 뒤집힌다.\n비명.\n오주일이 벌떡 일어난다.\n\n오주일\n엎드려!!!\n\n하지만 들리지 않는다.\n한 의병이 놀라 산채 뒤편으로 달린다.\n\n오주일\n가지 마! 자리 지켜!\n\n하지만 늦었다. 편백 사이에서 일본군이 튀어나온다.\n탕! 의병이 쓰러진다.\n반대편으로 달아난 의병 둘. 그쪽에서도 총구. 완전히 포위됐다.\n탕!\n총탄이 재보의 어깨를 관통한다. 화승총을 놓칠 뻔한다.\n\n염재보\n크윽...!\n\n재보가 이를 악물고 다시 총을 끌어안는다.\n정현이 엎드린 채 주변을 본다. 쓰러진 사람들. 놀라 굳어 있는 의병들.\n\n임정현\n탄약!\n\n아무도 듣지 못한다.\n정현이 옆 의병의 팔을 붙잡는다.\n\n임정현\n저 나무 밑! 돌 밑에 있소!\n\n의병이 몸을 낮춰 뛰어간다.\n탕!\n총알이 정현 바로 옆에 박힌다. 흙이 얼굴에 튄다.\n정현이 반사적으로 산채 움막 뒤로 몸을 숨긴다.\n숨을 몰아쉰다. 손이 떨리는 걸 스스로도 느낀다.\n저쪽— 의병이 나무 밑 돌을 젖힌다. 천에 싸인 탄약 꾸러미.\n정현이 바위 틈으로 그 모습을 본다. 의병과 눈이 마주친다.\n정현의 얼굴에 안도가 스친다.\n\n임정현\n그거 나눠!\n\n다른 쪽에서 총성이 터진다.\n탕! 정현이 움찔한다. 산채 움막에 몸을 붙인다. 숨을 고른다. 손이 떨린다..\n정현이 다시 몸을 조금 내밀어 다른 쪽을 가리킨다.\n\n임정현\n저쪽에도 있소! 큰 나무...\n\n탕!\n정현의 몸이 멈춘다. 가슴에 피가 번진다.\n정현이 움막에 기대듯 천천히 주저앉는다.\n오주일이 돌아본다.\n\n오주일\n정현아!\n\n정현은 눈을 뜬 채 움직이지 않는다.\n오주일이 몸을 반쯤 일으켜 가려는 순간—\n쾅! 쾅!\n둘 사이로 총탄이 쏟아진다.\n\n오주일이 다시 몸을 낮출 수밖에 없다. 바위 너머 정현을 본다. 손 하나 뻗으면 닿을 것 같은데, 갈 수 없다. 오주일의 눈이 붉어진다.\n\n오주일\n씨발...\n\n이를 악문다. 그리고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돌아선다. 목소리에 물기가 섞여 갈라진다.\n\n오주일\n엎드려! 움직이지 마!! 자기 자리 지켜!!\n\n사람들이 겁에 질린 채 조금씩 제자리로 몸을 낮춘다. 재보가 피 흐르는 어깨로 총을 든다.\n일본군의 총구가 다시 올라온다.\n\nS#57. 복내 장터 / 낮 - 같은 시각\n\n박상현이 달린다.\n뒤에서 규홍의 거친 숨. 상현이 돌아본다.\n피투성이 규홍이 낫을 든 채 다가온다.\n박상현의 얼굴이 하얗게 질린다.\n\n박상현\n개홍아. 잠깐—\n\n규홍은 멈추지 않는다.\n\n박상현\n나도 어쩔 수가—\n\n휙!\n낫이 날아간다.\n퍽! 상현의 등에 박힌다. 몸이 벽에 부딪힌다.\n규홍이 따라온다. 피투성이 손에는 또 하나의 낫.\n규홍이 등에 박힌 낫을 뺀다. 박상현이 벽을 타고 무너진다. 흙바닥에 힘없이 널브러진다.\n규홍은 내려다보지 않는다. 돌아선다.\n\n저 멀리 저잣거리 한복판에 일진회 시체들과 함께 관회가 쓰러져 있다.\n인적이 흩어진 거리에 놓여 있는 몸.\n규홍이 관회를 향해 한 걸음 내딛는다.\n그때 산 너머에서.\n쾅! 쾅! 쾅!\n연달아 터지는 총성.\n규홍의 걸음이 멈춘다. 몸이 그대로 굳는다.\n또—\n쾅! 쾅!\n규홍이 산을 본다. 다시 관회를 본다. 움직이지 않는 관회.\n\n규홍의 눈이 붉어진다.\n잠깐. 규홍이 관회에게 등을 돌린다. 그 등이 미세하게 떨린다.\n그리고 산을 향해 뛴다.\n\nS#58. 파청 산채 / 낮\n\n총성이 뜸해진다.\n화약 연기 사이로 산채가 드러난다.\n뒤집힌 솥. 깨진 밥그릇. 흙과 피에 뒤섞인 쌀밥.\n곳곳에 쓰러져 있는 의병들. 정현도 쓰러진 자리 그대로다.\n일본군들이 천천히 산채 안으로 들어온다. 총검 끝으로 쓰러진 몸들을 확인한다.\n한 의병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움직인다. 일본군의 군화가 멈춘다.\n푹! 곧 정적.\n능선 위. 토미이시가 산채를 내려다본다.\n\n토미이시\n(일본어) 철수한다.\n\n일본군 일부가 하산하기 시작한다.\n배상도가 산채를 한 번 돌아본 뒤 뒤따른다.\n\nS#59. 파청 오르는 숲길 / 낮\n\n규홍이 혼자 산을 오른다.\n등의 상처에서 흐른 피가 저고리를 적시고 있다.\n탕!\n산 위에서 총성. 규홍이 더 빨리 오른다. 비탈에서 발을 헛디딘다.\n쿵!\n규홍이 흙바닥에 처박힌다. 잠시 일어나지 못한다.\n뒤를 돌아본다. 나무 사이로 저잣거리 쪽이 아득하게 내려다보인다.\n관회가 쓰러져 있던 곳은 이제 보이지 않는다.\n규홍의 손이 흙을 움켜쥔다. 이를 악물고 몸을 일으킨다. 다시 산을 오른다.\n이번에는 뒤돌아보지 않는다.\n반대편 산길.\n토미이시를 비롯한 일본군 일부가 하산하고 있다. 두 길은 서로 어긋난다.\n\nS#60. 파청 산채 / 낮\n\n규홍이 능선을 넘어선다. 걸음이 멎는다.\n산채.\n연기.\n쓰러진 사람들. 움직이는 사람은 없다. 규홍이 천천히 내려간다.\n발밑. 깨진 밥그릇. 흙과 피 속에 흩어진 하얀 쌀밥.\n\n규홍의 시선이 움직인다.\n조금 전까지 함께 있던 사람들. 백정. 목수. 그리고— 정현.\n눈을 뜬 채 쓰러져 있다. 규홍의 걸음이 멈춘다.\n아침의 목소리가 겹치는 듯하다.\n\n안규홍(V.O)\n소 잡던 사람..나무 만지던 사람..글 쓰던 사람..\n\n규홍의 얼굴이 굳는다.\n저편에서 인기척. 규홍이 나무 뒤로 몸을 숨긴다.\n일본군 하나가 쓰러진 의병을 군화로 뒤집는다.\n총검으로 찌른다.\n푹.\n반응이 없다. 일본군이 다음 시신으로 간다.\n규홍이 산채를 둘러본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는다. 숨소리 하나 없다.\n규홍이 피 묻은 쌍낫을 움켜쥔다. 말없이 숲속으로 사라진다.\n\nS#61. 파청 산채 / 낮 - 계속\n\n일본군 하나가 무너진 움막 뒤편으로 들어온다.\n주변을 살핀다. 고요하다.\n한 걸음. 또 한 걸음. 나무 그림자. 안규홍의 눈.\n일본군이 지나치는 순간 규홍의 팔이 목을 감는다.\n일본군이 발버둥 친다. 규홍이 입을 틀어막은 채 그대로 숲 안으로 끌고 들어간다.\n잠시 후 움직임이 멎는다.\n규홍이 시신을 내려놓는다. 총을 집으려다 멈춘다.\n사각—\n아주 작은 소리. 규홍이 돌아본다. 총을 움켜쥐고 몸을 낮춘다. 나무 뒤를 돈다.\n쓰러진 의병들 사이. 무언가 움직인다. 규홍이 낫을 든 채 다가간다.\n그 순간 피 묻은 손이 화승총을 움켜쥔다. 규홍이 멈춘다.\n재보다. 어깨가 피로 흥건하다. 숨을 죽인 채 쓰러진 사람들 사이에 엎드려 있다.\n두 사람의 눈이 마주친다. 재보도 놀란다.\n\n염재보\n(거의 숨소리로) ...대장.\n\n규홍은 대답하지 못한다.\n그때 다른 쪽에서 미세한 움직임. 규홍과 재보가 동시에 돌아본다.\n무너진 나무더미 아래에서 오주일이 천천히 고개를 든다. 허벅지에 피가 흐른다.\n그리고 조금 떨어진 바위 뒤 복만도 모습을 드러낸다.\n한쪽 다리를 제대로 딛지 못한다.\n규홍이 세 사람을 바라본다. 재보. 오주일. 복만. 죽은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 있다.\n규홍이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n오주일도 끄덕인다.\n\n말이 없다.\n규홍이 산채 쪽을 돌아본다. 일본군 하나가 나무 사이를 지나간다.\n규홍이 재보를 본다. 산새소리를 입과 손바닥을 이용해 낸다.\n재보가 알아들은 듯 짧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곤 화승총을 움켜쥔다.\n규홍이 일부러 소리를 낸다. 나뭇가지를 밟는 척, 그림자를 슬쩍 드러낸다.\n일본군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린다. 총구를 돌린다.\n그 순간 반대편에서.\n탕!\n재보의 총. 일본군이 미처 돌아보지도 못하고 쓰러진다.\n규홍이 재보를 향해 짧게 고개를 끄덕인다. 재보도 마찬가지다.\n말 한마디 없이 새소리와 눈짓만으로 서로의 자리를 확인한다.\n이번엔 오주일이 손짓한다.\n\n오주일\n(낮게) 자리는 그대로.\n\n복만이 바위 뒤로 몸을 낮춘다. 재보는 총을 다시 장전한다.\n규홍이 숲속으로 움직인다.\n\nS#62. 파청 산채 하산 숲길 / 낮 - 계속\n\n탕!\n산 위쪽에서 총성이 울린다.\n하산하던 토미이시가 걸음을 멈춘다.\n다시\n탕!\n희미한 비명이 이어진다.\n토미이시가 산 위를 올려다본다.\n\n토미이시\n(일본어) 돌아간다.\n\n일본군들이 몸을 돌려 다시 산을 오른다.\n배상도는 불안한 얼굴로 뒤따른다.\n\n배상도\n(일본어) 남은 놈들입니다. 그냥 내려가시지요.\n\n토미이시가 배상도를 본다.\n\n토미이시\n(일본어) 남은 놈들이 총을 쏘고 있잖아.\n\n몇 걸음 오르지 않아—\n탕!\n일본군 하나가 쓰러진다. 일제히 총구가 숲을 향한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n\n토미이시\n(일본어) 전진해!\n\n병사들이 조심스럽게 다시 오른다.\n탕!\n또 한 명이 고꾸라진다.\n이번엔 반대쪽—\n탕!\n뒤따르던 병사가 비명을 지르며 쓰러진다.\n일본군들의 대열이 흔들린다. 토미이시가 좌우 숲을 노려본다.\n나무 사이로 순간순간 스치는 그림자들. 한 명이 아니다.\n토미이시의 얼굴에서 여유가 사라진다.\n\n토미이시\n(일본어) 흩어지지 마! 둘씩 붙어!\n\n병사들이 급히 서로 붙는다.\n그 순간—\n탕! 탕!\n또 두 명이 쓰러진다.\n배상도의 얼굴이 굳는다.\n\n배상도\n(일본어) 내려가야 합니다.\n\n토미이시는 대답하지 않는다. 이를 악문 채 산 위를 노려본다.\n그때 나무 사이로 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낸다.\n피와 흙투성이의 규홍.\n토미이시가 멈춘다.\n규홍도 멈춘다.\n두 사람의 눈이 마주친다. 배상도 슬그머니 뒷걸음질 하며 달아난다.\n\nS#63. 파청 산채 / 낮\n\n이미 시작된 규홍과 토미이시의 대결.\n규홍의 낫과 토미이시의 칼이 거칠게 부딪친다.\n챙! 챙!\n토미이시가 몰아붙인다. 규홍이 한 걸음씩 밀린다.\n등의 상처가 터지며 저고리 위로 피가 번진다.\n토미이시가 틈을 놓치지 않고 칼을 내리친다.\n챙!\n규홍이 낫으로 가까스로 막아낸다.\n다시\n챙!\n\n이번에는 버티지 못한다. 낫이 규홍의 손에서 튕겨 나가 흙바닥을 구른다.\n토미이시의 칼이 곧장 규홍을 향한다.\n규홍이 몸을 틀어 피하며 토미이시에게 달려든다.\n둘의 몸이 세게 부딪친다. 칼도 떨어진다.\n그대로 뒤엉켜 비탈을 구른다.\n규홍이 토미이시의 얼굴을 후려친다.\n퍽!\n토미이시도 그대로 받아친다.\n퍽!\n규홍이 다시 주먹을 날리려는 순간,\n토미이시가 규홍의 상처 난 등을 걷어찬다.\n규홍이 비명을 삼키며 앞으로 고꾸라진다. 토미이시가 달려들어 규홍 위에 올라탄다.\n두 손으로 목을 조른다.\n규홍이 토미이시의 손목을 붙잡는다. 버틴다. 하지만 조금씩 힘이 빠진다.\n토미이시의 손가락이 더 깊게 목을 파고든다.\n규홍의 시야가 흐려진다. 손에 힘이 풀린다.\n그 순간—\n규홍이 바닥의 흙을 움켜쥐어 토미이시의 얼굴에 뿌린다.\n\n토미이시\n으악!\n\n토미이시가 본능적으로 얼굴을 감싼다.\n규홍이 몸을 뒤집어 토미이시를 밀쳐낸다.\n둘 다 거칠게 숨을 몰아쉰다.\n토미이시의 눈에 바닥에 떨어진 칼이 들어온다.\n기어가듯 다가가 칼을 집는다. 규홍도 몸을 일으키려 한다. 팔에 힘을 준다.\n하지만 등의 상처가 당기며 다시 무릎이 꺾인다.\n토미이시가 칼을 들고 다가온다.\n규홍이 뒤로 물러난다.\n토미이시가 칼을 치켜든다.\n내리친다.\n규홍이 몸을 굴린다.\n푹!\n칼날이 규홍이 있던 자리에 깊게 박힌다.\n규홍의 손이 바닥을 더듬는다.\n손끝에 무언가 걸린다.\n낫자루.\n규홍이 움켜쥔다.\n토미이시가 칼을 뽑아 다시 달려든다.\n규홍은 아직 등을 보인 채다.\n토미이시가 칼을 들어 올리는 순간—\n규홍이 몸을 홱 돌린다.\n\n푹!\n낫 끝이 토미이시의 옆구리에 깊숙이 박힌다.\n토미이시의 몸이 굳는다.\n규홍이 낫을 놓지 않는다.\n토미이시가 이를 악물고 칼을 휘두른다.\n규홍이 몸을 붙여 칼을 피한다.\n그리고—\n낫자루를 양손으로 움켜쥔 채 온몸으로 당긴다.\n쫘악—\n낫날이 토미이시의 옆구리를 깊게 가르며 빠져나온다.\n토미이시가 휘청인다.\n그래도 쓰러지지 않는다.\n규홍을 노려본다.\n규홍도 숨을 몰아쉬며 그를 바라본다.\n잠깐의 정적.\n토미이시가 마지막 힘을 짜내 칼을 들고 달려든다.\n규홍도 달려든다.\n한순간—\n규홍의 낫이 다시 토미이시의 몸을 파고든다.\n푹!\n토미이시의 움직임이 멎는다.\n두 사람의 얼굴이 코앞이다.\n규홍이 이를 악문 채 낫을 더 깊이 밀어 넣는다.\n토미이시의 손에서 칼이 떨어진다.\n챙그랑.\n다리에 힘이 풀린다.\n토미이시가 천천히 무너진다.\n규홍은 낫을 쥔 채 그대로 서 있다.\n거친 숨.\n피와 흙으로 범벅된 얼굴.\n쓰러진 토미이시를 내려다본다.\n잠시 후—\n규홍도 결국 한쪽 무릎을 꿇는다.\n\nS#64. 파청 산채 / 낮\n\n정적. 화약 연기가 서서히 걷힌다.\n쓰러진 일본군들. 그러나 산채 역시 처참하다. 죽은 의병들이 훨씬 많다.\n임정현의 시신. 심하게 다친 재보가 나무에 기대앉아 어깨를 움켜쥐고 있다.\n오주일도 팔에 피를 흘리며 서 있다.\n불타거나 무너진 움막.\n아까까지 사람들이 웃으며 먹던 밥그릇과 감자가 피와 흙 속에 흩어져 있다.\n\n누구도 환호하지 않는다. 규홍도 승리했다고 느끼지 않는다.\n살아남은 사람들이 서로를 확인하듯 눈으로 훑는다. 아무도 입을 열지 못한다.\n규홍이 천천히 일어난다. 복만을 내려다본다. 잠깐.\n그리고 주변을 둘러본다. 살아남은 사람들.\n\n안규홍\n(낮게, 갈라진 목소리로) ...다친 사람부터.\n\n오주일이 먼저 몸을 움직인다.\n\n오주일\n(겨우) 다친 사람... 부축해.\n\n의병들이 서로를 부축하기 시작한다. 느리고 무거운 움직임.\n그 순간—\n아래 산길에서 소리가 들린다.\n쿵. 쿵. 쿵. 쿵.\n모두가 멈춘다.\n점점 가까워지는 군화 소리. 멀리서 일본어 고함.\n\n일본군(O.S.)\n(일본어) 위쪽이다! 서둘러!\n\nS#65. 파청 산채가는 길 / 낮\n\n멀리 나무 사이로 일본군 부대가 모습을 드러낸다.\n앞장선 배상도.\n그 뒤로 오십여 명의 일본군.\n총검을 단 소총. 말. 군수품을 실은 수레. 수레 위 기관총.\n산길을 가득 메운다. (AI 제작)\n배상도가 말 한 필의 고삐를 잡고 걷는다.\n말 위에는 새로운 헌병대장. 무표정한 얼굴로 산 위를 바라본다.\n배상도가 눈치를 보며 말을 건다.\n\n배상도\n(일본어) 제가 그렇게 말렸는데도... 토미이시 대장을 막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n\n헌병대장은 대꾸하지 않는다. 배상도가 다시 올려다본다.\n\n배상도\n(일본어) 그래도 제가 길은 압니다. 안규홍 놈 산채도—\n\n헌병대장\n(일본어) 시끄럽게 말이 많구나.\n\n배상도가 멈칫한다.\n헌병대장이 천천히 군도를 뽑는다. 배상도의 눈이 커진다.\n\n서걱—!\n군도가 배상도의 목을 가른다.\n배상도가 고삐를 놓친다. 두 손으로 목을 움켜쥔 채 무너진다.\n헌병대장은 쓰러지는 배상도를 내려다보지도 않는다.\n군도에 묻은 피를 한 번 털어낸다. 산 위를 바라본다.\n\n헌병대장\n(일본어) 한 명도 살려두지 마라.\n\n일본군\n(일본어) 하이!\n\n철컥. 철컥. 일제히 소총을 고쳐 쥔다. 기관총 수레가 앞으로 움직인다.\n말발굽. 군화. 수십 명의 일본군이 산을 오르기 시작한다.\n\nS#66. 파청 산채 / 낮\n\n큰 부대급 일본군 병력을 보고, 의연하게 눈을 마주친다.\n재보가 나무에 기대 있던 몸을 일으킨다.\n어깨에서 피가 흐른다. 오주일이 총을 집어 든다.\n살아남은 의병 하나가 쓰러진 동료의 총을 빼든다.\n또 한 명이 칼을 집는다. 누가 시키지 않았다. 규홍이 그들을 본다.\n\n안규홍\n함께해서 영광이었소. 세월이 우리를 잊지 않을것이오.\n\n의병들 서로 바라보면 “고마웠오. 원없이 살았고마. 언능 끝내고 밥이나 먹게”\n모두 규홍을 바라본다. 규홍이 피 묻은 낫을 고쳐 쥔다. 한 걸음 앞으로 나간다.\n오주일. 재보. 남은 의병들. 규홍이 그들을 한번 본다.\n\n안규홍\n가자.\n\n규홍이 먼저 걷는다. 절뚝인다.\n그 뒤로 재보. 오주일. 복만. 그리고 살아남은 의병들이 하나둘 따라붙는다.\n누군가는 부상자를 부축하고, 누군가는 일본군에게서 빼앗은 총을 메고, 누군가는 빈손이다.\n규홍은 앞만 본다.\n낫을 든 손은 아래로 늘어져 있다. 사람들이 규홍의 뒤를 따라 걷는다.\n느리지도, 빠르지도 않다. 누구도 말을 하지 않는다.\n편백 사이로 피투성이 사람들이 정면을 향해 걸어온다.\n규홍이 맨 앞. 그 뒤로 사람들이 점점 화면을 채운다.\n어디로 가는지는 보이지 않는다.\n규홍의 얼굴. 지치고, 피투성이지만 걸음을 멈추지 않는다.\nCUT TO BLACK.\n\n<자막>\n머슴 의병장 안규홍(보성, 1879~1911)이 이끈 의병부대는\n파청에서 일본군을 물리치며 첫 승리를 거두었다.\n일제가 남긴 기록에는 그를 이렇게 적고 있다.\n\n“거괴(巨魁) 안규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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